사량도 지리산
‘삼천포-사량도’ 간 유람선에 머무르는 2시간 포함, 왕복 10시간을 들여 저 멀리 지리망산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엇 때문인가. 멀고 먼 길을 좌고우면 하지 않고 찾을 때는 분명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량도(蛇粱島)라는 이름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 ‘사랑도’로 잘못 인식되게 발음되는 것도 조금은 이유로 작용할지 모른다. 바다에서 산을 동경의 염으로 올려보고 산에서 바다를 망연히 내려다볼 수 있는 것도 좋아할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섬이, 섬 속의 산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사랑받을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쪽 바다에서도 또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이어서 가보지 못한 생소한 곳이지만 그동안 산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접하고는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리며 탐방의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고대했다. 다녀왔다는 몇몇들로부터 추천의 말을 들으며 그곳에 가고 싶은 여망은 한층 굳어가고 있었다. 호시탐탐 하다가 이번에 기회가 닿은 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잔뜩 끼어 태양은 중천에 올랐어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렌지색 탁구공같이 동그란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을 떠난 4시간 뒤 한낮의 뱃길도 해무(海霧)에 싸여 시야가 흐릿하다. 섬까지 20킬로가 안 되는 거리인데 우리가 떠난 삼천포는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바닷물만 넘실거린다. 출항한 지 40여 분 뒤에 섬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산 덩어리가 묵직하게 다가오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이 육지의 지리산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지리산을 품고 있는 사량도일 것이다.
쉽게 사랑도라 하면 부르기도 듣기도 좋으련만 구태여 혀를 꼬부렸다 펴며 발음해야 하는 사량도는 비슷한 크기의 윗섬과 아랫섬이 위아래로 마주 보고 있다. 우리가 오르려는 지리산은 그중에 윗섬을 동서로 가르는 산줄기가 지리산(398m) 불모산(399m) 가마봉 옥녀봉(281m)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첩’으로 들었다가 슬그머니 받침을 떼버리고 ‘처’ 행세를 하듯이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 또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산이라 해서 처음에는 ‘지리망산(智異望山)’이라 했다는데 이제는 ‘망’ 자를 버리고 공공연히 지리산이라 불리고 그렇게 부르는데 아무런 가책이 없다. 그래도 본토의 지리산이 하도 명산인데 다가 꿋꿋하게 그 위엄을 지키고 있어 꼭 구분하려 한다면 번거롭더라도 ‘사량도 지리산’이라 하면 된다.
산행에 앞서 결정해야 할 것은 옥녀봉을 나의 코스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주봉이라는 지리산이 비록 해발 4백도 안 되는 표면상 작은 산이고 옥녀봉은 거기서도 100이 빠지는 281에 불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원래 산은 자그마하나, 산세는 작은 고추처럼 매운맛을 풍기며 그중에도 옥녀봉은 청양고추처럼 더욱 작으면서 혹독하게 매운맛을 보여주는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남하하는 동안 차 안에서 인솔자는 그러한 이유로 옥녀봉을 뺀 코스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발언을 행여나 못 알아들었을까 하여 몇 차례 하였다. 그렇지만 휴게소 화장실을 오가는 길목이나 모여 있는 자리 어디에서든 일부 회원들의 쑤군대는 소리는 그것을 빼먹으려면 무엇하러 이 먼 데까지 오느냐는 것이었다.
다소 걱정되고 불안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면 남이 하면 나도 해보고 싶다. 더욱이 산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해서 내심 옥녀봉을 거치는 코스선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에 쫓기지 말아야 하고 여유를 갖자면 선두그룹에 있어야 한다. 명성이 자자한 위험 구간이니 세심한 주의로 임해야 하지만 산행시간도 1시간 이상 더 걸리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특징을 세 마디로 압축하면 ‘아슬아슬한 암벽’ ‘칼날 같은 능선’ ‘연이어진 암릉’이다. 대체로 코스 대부분 구간이 이런 모양이지만 그 정수(精髓)는 옥녀봉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힘은 들어도 아기자기하고 험난한 요소들을 극복하는 스릴을 맛보기 위하여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자그마한 산이 본토에서 가장 넓게 차지하고 또 제일 높은 지리산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해서 같잖다고 업신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람선에서 내려선 동네 돈지리는 가구 수 50여 호와 초등 분교 하나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선착장에 발 딛는 순간 후끈한 기운이 온몸에 끼쳐온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강한 바닷바람을 쐬며 선상 갑판에 서 있을 때는 전혀 모르던 열기다. 빨리 전망 좋은 주 능선에 올라서야 시원한 해풍을 다시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산은 대체로 바위들로 형성되어 있고 그 바위들은 예사롭지 않다. 지질학자들은 태초 지각변동이 있을 때 어떤 과정으로 생성되었다고 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바닷물과 관련이 있는 사암 이판암 따위의 퇴적암이 아닐까 생각된다. 시루떡처럼 켜켜로 아무렇게나 박혀있기도 하고 표면은 대부분 날카롭고 모나게 울퉁불퉁하여 딛는 발바닥이 얼얼하다. 지압을 받는다고 좋게 여기려 해도 우선은 부담스럽고 그것도 잠깐일 때 이야기지 오래 계속되면 피로가 가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이 산을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생긴 모습은 어쨌든 스릴 넘치는 코스들은 용아장릉을 빼다 박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량도 지리산이 본토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라면 아버지뻘 되는 지리산이 화개재에서 철 사다리를 딛고 한번 푹 내려갔다가 다시 토끼봉으로 올라가듯이 이 작은 지리산도 불모산과 옥녀봉 사이가 깊어 무려 20여 미터의 수직 철 사다리를 타게 되는 것이다. 무식할 정도로 곧추세워져 있고 제법 센 바람이 불어와 꽉 틀어쥔 손아귀 힘을 빼려 드니 여차하면 영혼이 몸 밖으로 뛰쳐나갈 판이다. 그러잖아도 양쪽으로 수십 길 낭떠러지의 좁고 날카로운 암릉을 꽤 길게 낑낑거리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한차례 혼쭐난 뒤끝이다.
다음으로 나의 담력을 시험하려는 것은 수직에 가까운 70도가량의 암벽을 굵은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20여 미터를 올라가는 것이다. 굵으므로 끊어질 염려는 없겠지만 대신 한 손아귀에 만만하게 쥐이지 않아 힘이 잘 실리지 않으니 긴장의 끈도 꽉 잡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여기는 20도쯤의 경사라도 있으니 여차한 경우 그런대로 몸을 바위에 의지하여 잠시 숨을 돌릴 수는 있다.
옥녀봉을 여는 마지막 관문은 비록 먼저 맛본 것에 비하면 10여 미터로 훨씬 짧기는 해도 완전한 수직의 암벽이다. 한 발 두 발 옮겨 디딜 틈이란 것이 여유로운 확보가 안 되어 불안감이 증폭된다. 그래도 이것만 오르면 마친다는 희망으로 안간힘을 다하여, 그야말로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부을 듯이 매달렸기 때문에 끝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정상을 올랐다 해서 상황 끝은 아니었다. 수직의 암벽은 오를 때 못지않게 내리기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위험도는 하강할 때가 더 높을 수 있어 세심한 주의력은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내리는 쪽에는 디딜 부분이 더 안전해 보였고 줄사다리를 타고 내리는 구간도 철 사다리에서 보다는 수월한 느낌이다.
10여 년 전 겁 없이 용아릉을 탔을 때 그것을 후회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는 못 올 데를 온 것 같았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사량도 지리산을 잊지 못하여 훗날 다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이 옥녀봉을 먼 빛으로 바라보기나 하고 지나쳐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산을 재촉한다. 이번의 경험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안 할 생각이다.(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