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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39)

by 김헌삼


발왕산, 슬로프를 가로지르며



스키슬로프가 있는 발왕산에는 산행길이 병존(倂存)한다. 등산로가 있던 산에 스키장이 후에 생겼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발왕산을 끼고 있는 용평리조트는 대단위 숙박 시설은 물론 여러 가닥의 등산로와 20여 개의 스키슬로프, 2개의 회원제 클럽 외에 9홀 퍼블릭 골프코스까지 고루 갖춘 종합레저타운이라고.

어쨌거나 40여 명의 대원은 모란고속관광버스에 실려 새벽공기를 가르며 눈꽃산행이라는 명목으로 발왕산을 찾았다. 무슨 ‘황토빌’인가 하는 펜션형 건축물 앞에 하차하여 용산리 곧은골 윗곧은골 쪽, 스키장 뒤편으로 깊숙이 산자락을 향해 줄을 지어 들어가는 우리 행색은 마치 산 너머 스키장 시설을 폭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잠입하는 무장특공대처럼 보였다.

자동차 길이 끝나는 곳이 곧 등산로의 시작이었다. 대부분 새마을회관 앞 사잇골로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코스라지만 우리는 더 안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발왕재를 거쳐 스키장 뒤쪽에서 발왕산 정상 1,458 고지를 점령한 후 스키장 쪽으로 내려오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니 특공대의 일원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월의 중순도 훨씬 지난 26일 강원도 깊은 산골이라면 눈이 내리고 그것이 채 녹기도 전에 또 퍼붓기를 거듭하여 온 산야가 하얗게 뒤덮여있어야 제격일 터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산재한 눈들은 언제 내렸던 것인지 덮인 곳보다 맨땅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많다. 워낙 한랭한 지역이라 한 번 내린 것들은 시간을 끌며 천천히 증발하며 소멸해 가기 때문에 그나마 잔설(殘雪)이라도 볼 수 있는 형국이었다. 길옆으로 흐르던 냇물은 ‘앙!’ 하고 순간 결빙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초입부터 댓 발작은 건너뛰어야 하는 꽁꽁 언 얼음 내[川]가 가로막고는 했다. 그 빙판이 얼마나 반질반질하냐면 내려다보는 눈알이 휙 미끄러질 지경이다. 모두 엉거주춤 조심스럽게 건너느라 내가 나타나면 예외 없이 다소나마 정체(停滯)가 있어 주춤거리고는 했다. 서너 번쯤 건너가고 되짚어 오기를 반복하다 발왕재로 올려 붙는 급경사가 시작된다. 경사가 빨라지면 힘은 더 들어도 거리가 짧아지는 이점은 있다.

능선에 올라서며 일단 가쁜 숨을 고를 여유를 갖게 되었다. 길이라고 생긴 것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듯 돌부리에 자주 걸려 걸음이 잡히고는 했고, 제멋대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은 이제 끝이겠지 하면 다시 헤쳐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대체로 능선은 한쪽이 응달이라면 또 다른 편은 양지이게 마련이었고, 응달과 양지는 눈이 깔린 쪽과 아닌 것으로 쉽게 구분되었다.

동참하게 된 이 산악회 회원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연로해 보였지만 산에만 들어서면 펄펄 나는 산꾼들인 양 얼마나 기세 좋게 내달았는지 시야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애초에 얼음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맨 뒤로 처졌고 첫 능선에 올라 산허리를 길게 감아 돌아갈 무렵에야 페이스를 재촉하여 겨우 중간 그룹으로 합류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산허리가 끝나는 지점 안부가 도면상에 나타나 있는 1,253 고지인 듯했고 여기서 좌측으로 틀어 올려 붙는 능선의 막바지가 정상부근일 것이다. 이제 한두 차례만 더 용쓰면 힘든 코스는 끝날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가까이 지난 시점, 비탈에 서서 비로소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과 식수로 고갈되다시피 한 에너지를 다소 충전(充塡)할 수 있었다. 이제 정상 언저리 어디쯤에서 중식을 들 때까지 더 멈춰 서는 휴식은 없어야 저들과의 간격이 어느 정도 단축될 것이다. 다만 힘들면 보폭을 길게 잡고, 안 되면 속도를 올려 따라붙어야 한다.

이산에는 이상하리만큼 자락에서부터 1,300 고지까지 갈잎나무 일색이다. 푸른 잎을 한 나무는 솔은 물론 그 흔한 노간주나무조차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능선 길에는 아담한 진달래들이 숲을 이뤄 꽃 피는 봄이 오면 애처로운 두견화의 잔잔한 분홍 물결이 살랑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1,400 고지 정상부근에 올라서야 비로소 몇 그루의 주목과 분비나무가 상록수로 포진하고 있음을 본다. 어디선가 반기듯 ‘까악, 까악’ 까마귀들의 쉰 목소리가 부산하다. 또 어느 것은 ‘까옥, 까옥’ 하니 암컷과 수놈이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앞이 ‘어서 오세요’ 하면 뒤는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하는 그들 나름의 다른 언어인지 알 수 없다.

91년 여름 한국자연보존협회의 학술조사보고에 의하면 발왕산은 ‘양서, 파충류의 보고(寶庫)’로서 멸종위기에 놓인 도마뱀 물두꺼비 등의 집단 서식처뿐 아니라 검독수리 산양 등 천연기념물도 다수 발견되는 등 희귀종들을 포함하여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어디서 어떤 형태로 겨울을 견뎌내는지 아니면 그사이 멸종되었는지 우리 앞에 ‘나 여기 있소.’하는 동물은 저 까마귀들이 유일하다.

주목(朱木)에 주목(注目)하게 된 지는 꽤 오래된 일이어서 이제는 망설일 필요 없이 판별할 수 있다. 분비나무라는 것은 꼬리표가 붙어있어서 그런가 하지 이름도 비슷한 가문비나무와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모두 침엽상록수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주목에는 ‘살아서 천년, 죽어 천년[生千死千]’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니고, 내음성 내한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내한성이라면 차가움에 견디는 성질을 말하는데, 견뎌낸다기보다는 서늘하고 추운 곳에서 오히려 잘 적응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소백산 태백산 두위봉 이곳 발왕산 등 1천5백 고지에 주로 자생하여 고고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간 일행들 그림자라도 잡으려고, 한겨울이지만 축복이 내리듯 온화하고 화창한 날에 돌무더기인 돌탑과 표지석이 있는 정상에서 사방 전망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10여 분쯤 더 간 스키장의 시설물 드래곤피크에 이르니 선두 일행들이 거기 모여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이미 중식을 마친 그들은 다시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바쁜 것인지 우리에게는 서두르고 또 서둘러 한없이 달아나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우리도 점심 요기로 먹을거리를 모두 축냈을 때는 2시 무렵이었다. 애초에 인솔총책은 3시 반까지 버스주차장으로 오라 하였으니 1시간 반이면 하산 길로 충분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이 산에 와서 걷고 싶은 눈길다운 눈길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드래곤피크의 곤돌라를 타면 2,30분으로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지만 뒤처진 우리 마지막 4명은 걷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하산 코스는 스키슬로프 골드라인과 나란히 내려가다 서로 엇바꾸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동찻길을 건너뛰는 들고양이들처럼 활강하는 스키어들이 뜸할 때 잽싸게 건너고는 하였다. 이런 짓을 적어도 세 번은 한 것 같다. 꼬박 1시간 반 걸려 기다리고 있는 버스 곁으로 갔을 때는 우리가 마지막 하산 주자였다. 우리 뒤에 있던 일행 몇은 공언했듯 곤돌라를 타고 이미 모두 내려왔으며 다행히 그들은 막연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소주와 찌개 안주로 간단한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잠시 수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찾아갈 때보다 더 빠르다 싶을 만큼 길은 막힘이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듯한 대원들 대부분은 오늘의 발왕산 풍경들을 하나하나 머리에서 꺼내 가슴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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