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봉 철쭉 정원
일찍이 봄을 알리기 위하여 찾아왔던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복사 등 울긋불긋 화려한 꽃들이 물러나면 아카시 찔레 때죽 등 순백의 소박한 꽃들이 환하게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며 그들을 대신한다. 청계산 철쭉은 월초에 피었다가 채 그 자태를 뽐내보지도 못하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밀려 서둘러 떨어졌으니 그 아쉬움을 채우려 바래봉으로 떠난다. 지리산 지능(支稜) 바래봉의 그것은 지금 한창일 것이란 기대와 희망이 있다.
그런 기대가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은 관할관청인 남원시 운봉읍 홈페이지에서 실시간이나 다름없이 며칠 간격으로 올려준 개화 상태를 이미 사진으로 점검하였기 때문이다. 전국 제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놓듯 활짝 피어있는 철쭉들을 영상물로는 여러 차례 보아 익힌 바 있으나 실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찾아가기는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기대에 부풀고 생각보다 설렘의 강도가 높다.
분당을 출발하여 딱 4시간 만에 도착한 현지 용산마을 주차장은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보름여 전(4월 30일)에 축제 행사가 치러졌다는데 아직도 흥청거리는 분위기다. 산행 초입에서부터 밀리는 인파에 걸려 나아감이 지체되고는 한다. 아무 준비 없이 행락 차림으로 따라나섰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내려오는 딱한 중년 부인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그것으로 살아온 듯 힘든 걸음을 오기로 내딛는 지긋한 노년(老年)도 보인다.
주차장을 지나 좁은 산길로 들어서니 초입에도 철쭉이 무더기무더기 무리 지어 숲을 형성하고 있으나 이곳은 이미 오래전에 꽃이 진 듯 잎만 무성하다. 그 속에서는 간혹 풋풋한 더덕향이 살짝 코끝을 스쳐 가고는 한다. 이어 키 큰 소나무 등 숲길을 1시간 20분가량 올라가니 큰길 삼거리에 닿는다. 정상 바래봉(1,165m)으로 향하는 길과 팔랑치 세걸산을 거쳐 종국에는 휴게소와 자동차 길과 만나는 정령치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스님들의 밥그릇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 같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바래봉. 꼭대기를 가면 정상 안내표지나 만져보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왕복 30분만 더 걸으면 되는 것을 찝찝하게 생략하고 지나쳐버릴 이유가 없다. 정상은 바리때라기보다 깨끗하게 삭발한 스님의 머리처럼 나무 하나 없는 밋밋한 초지이다. 그러니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좋다. 북쪽으로는 남원시가지와 운봉 너른 벌판, 남쪽으로는 지리산 주 능선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의 여러 봉우리와 유장하게 뻗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니 가슴까지 뿌듯하고 시원하다.
삼거리에서 팔랑치 방향으로의 능선 위 통행로는 폭 2,3미터 또는 3,4미터로 넓게 형성되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멀리 뻗어 나갔다. 마치 사진에서 본 만리장성 성곽 사잇길을 연상시킨다. 그 주변으로 철쭉꽃이 주로 진분홍이지만 간혹 연분홍 또는 흰색이 적절히 섞여, 크고 작은 군락을 이뤄 만개한 모습이 흡사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이다. 어느 곳은 무더기무더기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꼭 양들이 끼리끼리 뭉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원래 이곳은 고산으로 한때 숲이 울창하였으나 1971년 대단위 면양(綿羊)목장을 설치 운영할 당시 일대에 방목되고 있던 양들이 잡목과 풀을 뜯어 먹으면서 독성이 있는 철쭉만 남겨 그것이 군락을 형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산상에 호주산 면양들이 입으로 가꾸어 놓은 철쭉 정원인 셈이다.
바닷속에는 갈치 꽁치 삼치 등이 서식하고, 밭에 가면 상치 시금치가 자라듯이 바래봉으로 대표되는 1천에서 1천3백 고지 사이의 이 지리산 지능선(支稜線)은 정령치(正嶺峙)에서 시작하여 세동치(世洞峙) 부운치(浮雲峙)를 거쳐 팔랑치(八郞峙)로 이어져 있다. 그 마지막 고갯마루 팔랑치 주변에 대한민국을 대표(나는 아직 이보다 더 좋은 철쭉을 보지 못했다)하는 철쭉군락지가 있다. 정령치에서 시작하여 고리봉 세걸산을 거쳐 팔랑치로 향하다가 용산리로 하산하는 능선 종주 코스는 산행시간을 6시간 이상 잡아야 하는 긴 등정이다. 우리는 철쭉이 집중적으로 있는 곳을 주로 거치는 용산리주차장 바래봉 팔랑치 산덕마을을 돌아 내려오는 짧은 코스를 택하였을 것이다.
팔랑치의 철쭉군락은 분홍물감을 흠뻑 뿌려놓은 것처럼 멀리 보일 때부터 그 일대의 선명함이 설레게 하더니 가까이 다가가니 마침 개화의 절정이다. 온통 짙붉은 색깔이 선연하다. 이곳 팔랑치 고갯마루 이정표가 있는 자리에서 1,123봉을 향한 등성이에 형성된 철쭉군락지가 바래봉 철쭉 감상의 하이라이트다. 이런 풍광이 만들어지기에는 긴 세월이 필요했을 터이지만 꽃이 피어있는 기간은 열흘이나 될는지? 그중에서 색감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것은 길게 잡아도 며칠일 것이다. 바로 그 기간에 운 좋게도 우리가 찾아온 듯하다.
어떤 여자는 여기서 속옷을 적셨다지만 본인이 발설했을 리도, 누가 본 것도 아니니 그것은 감탄의 표현을 필설로는 어려워 과장되게 비유한 것이 아닐까. 다만 느낌이 격하여 눈물이 배이거나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망연한 기분에 쌓였던 사람은 다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야!” 단 한마디로 또는 “좋다!”는 두 마디로 깊이 느낀 감정을 짤막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기도 하고 마침 중식 시간도 꽤 지나 있어 환상의 철쭉 구릉 가까이 자리 잡고 요기를 하기로 한다. 친지 동행 없이 단독 참가하다 보니 처음부터 줄곧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고 그 김에 오늘은 철저하게 혼자 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차 안에서도 옆자리 사람에게 말 안 붙이고 주로 창밖 풍경에 시선을 주거나, 졸다가 그도 아니면 책을 잡았었다. 산에서도 많은 인파 속에 나는 홀로였다. 혼자 보고 느낀 것을 나중에 친족 친구 친지들에게 말하거나 보여주더라도 여기서는 경관이나 감동을 영상이나 가슴 속에 묻어두기만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취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오를 때 뒤처지기도 했지만 다른 많은 사람과 뒤섞여 우리 일행들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앞서간 리더 그룹이 헷갈릴 만한 자리에 인식표를 남겨 혼란은 없었으며 하산해보니 비교적 선두그룹에 끼어 내려온 폭이었다.
4시간 걸려 차 타고 내려가 4시간 산행을 하였고 하산지점 산덕마을을 떠나 아침에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도 4시간이었다. 아직도 진분홍 철쭉 언덕의 환상(幻像)이 뇌리와 심중에서 오락가락한다. (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