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횡단여행(7)

by 김헌삼

7. 퍼시 워너 공원에서


미국에 오기 때문에 일주일에 2, 3차례 다니던 산을 열흘 이상 지나도록 못 가고 있다. 매일 아침 공원이나 다름없는 거리나, 캠퍼스 경내를 걷기는 하지만 등산과는 생판 다르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비탈진 길을 힘들여 오르기 때문에, 평지를 걸을 때보다 땀도 더 많이 흘리고 심폐기능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높은 곳에 올라 낮은 곳을 굽어보는 맛은 산에 가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퍼시 워너 공원(Percy Warner Park)이 약 2시간 코스로 등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기서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한번 꼭 가보고 싶었다. 식구들은 각자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할 일이 있다고, 데려다줄 테니 갈려면 혼자 가란다. 그리고 날씨도 오후 들며 꾸물거려 비 올 것 같은데 꼭 가겠느냐고 했을 때도 이미 굳어진 마음이 흔들릴 리 없다.

그곳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가는 길은 단순했다. 밴더빌트 정문이 면하고 있는 웨스트엔드(West End) 불바드를 따라 계속 가다가 바로 왼편에 있었다. 지수가 약 2시간 후인 4시에 데리러 오기로 하고 산길(trail)의 출발점에 떨어트렸을 때 주변 주차공간에 차량은 한두 대 보였지만 사람은 하나도 없는 깊은 숲이었다. 키 큰 나무들만 울창하다.

시작점에 코스를 그려놓은 안내판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색깔로 얼기설기 복잡하게 되어있어 개념조차 얼른 머릿속에 넣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이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었고, 늘 지니고 다니던 나침반조차 하필이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빼놓고 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필요 없을 때는 곁에 있고 꼭 필요할 때 찾으면 없다. 공연히 왔나 하는 순간 차는 떠나버리고 없다. 이제 연락할 길도 없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두 시간 후에 차에서 내린 자리에서 다시 딸을 만나는 것뿐이다.

무슨 일이야 있겠나, 여차하면 되돌아오자는 심정으로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떼어놓는다. 길은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확실하게 트여있는 데다가 나무에도 적당한 간격으로 흰 페인트칠이 있어 이탈될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얼마 안 가 승마전용로(horse trail only)가 교차한다. 산(이름이 공원이니 높은 곳이라 해도 산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을 것 같다)의 높이는 분당의 불곡산 정도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비가 내렸던 듯 길이 몹시 젖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30분쯤 올랐을까? 자동차 길과도 마주친다. 그러니까 여기는 세 종류의 길이 있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뛰다 지치면 기어가든 나 같은 홀몸의 사람이 가는 길. 사람을 태운 말이 토닥거리는 길. 사람 탄 차가 굴러가는 길. 세 길이 공통되는 점은 모두 몹시 꼬불댄다는 사실이다. 오르다가 평평하고,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심술 사납게 왼쪽으로 꼬부라지고 하며 이것만은 내가 꼭 틀어쥐고 잊지 않으려던 방향에 대한 감각을 사정없이 흩으러 놓는다.

어쨌거나 산 너머 반대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나인 홀쯤 되는 골프코스도 있다. 띄엄띄엄 있는 듯 없는 듯 몇몇 사람이 즐기고 있다. 골프장 둘레도 한 바퀴 돌아본다.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별다른 것은 없다. 별장 같은 주택이, 이것도 역시 드문드문 있는 듯 없는 듯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동서남북을 잃은 마당에, 하는 방법이라곤 오직 표시된 트레일을 따라 죽으나 사나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이 길을 가다가 죽을 리 없겠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지 은근히 겁날 만하게 엇나가듯 길게 뻗어있다.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듯한 인기척이 있어 놀란 가슴으로 돌아보려니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젊디 젊은 처녀가 "익스큐즈 미!" 하고 휙 지나쳐 뛰어나간다. 잠시 황당하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젊은 여자가 감히 혼자 다닐 정도면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신변 안전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다.

골프장 한 바퀴 돌며 소비한 시간을 만회하려면 조금 걸음을 빨리할 필요가 있다. 평상시 같았으면 나도 뛸 수 있으련만 비에 젖은 길은 물이 고인 곳을 피해야 할 정도로 질척이고 미끄럽다. 그러나 아무리 꼬부라지고 비틀렸어도 길의 끝은 여지없이 처음과 만나게 되었다.

서두른 탓으로 4시가 조금 안 되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섰다. 비록 비에 젖고 하얗게 빨았던 운동화는 흙물이 튀어 사정없이 더럽혔지만 오랜만에 땀도 흘리고 기분이 개운한 하루였다. 숲 속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가 가장 뿌듯하고 행복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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