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Walk slow, breathe deep
하루만 지나면 열흘여 간 묵었던 내시빌을 뜬다. 테네시와도 결별이다. 지수가 이곳과 인연을 맺은 덕으로 우리도 불현듯 미국의 동남부 풍토를 겪어볼 기회를 맞았다. 토박이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없어 인정의 깊이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 와서 보고 느낀 것은 길이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내시빌에서 잭 대니얼스(Jack Daniel's) 위스키 공장까지는 90마일이니 150킬로,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I-24를 타고 맨체스터까지 가서 여기부터 털라호마를 거쳐 인구 36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 린치버그의 공장까지 약 26마일. 실제로 맛보기는 처음인 미국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워 즐겨 부르던 미국민요 「언덕 위 나의 집(Home on the Range)」 바로 그것인 모습들이 줄지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는 한다.
술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잭 대니얼 위스키를 마셔본 기억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술 실력이라는 것이, 맛까지 즐기는 정도는 아니므로 평가할 능력도 없고 다른 것과 변별해서 말하지도 못한다. 지수가 가볼 만한 곳으로 여기를 꼽을 때 비로소 위스키병에 붙은 상표 한복판에 테네시라는 글이 분명하게 씌어있는 것을 깨달을 정도였다.
내시빌을 떠나 1시간 반쯤 걸려 도착한 공장의 방문객센터(visitor's center)는 생각보다 달리 조촐한 크기의 목조건물이었다. 출입문 밖 테라스에는 옛날 서부영화에서 보듯 흔들의자가 죽 늘어있고, 두서너 명의 힘없어 보이는 늙은이들이 기대앉아 흐느적거리는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방문객들은 찾아오는 순서대로 약 20명 정도를 한 그룹으로 만들어 번호표를 나누어준다. 우리 가족은 <그룹 8>로 배당되었다. 우리 그룹을 담당할 가이드는 배가 이 공장의 배럴 술통만큼 나오고 머리는 복판이 홀딱 벗어진 50대쯤 되는 남자였다. 머리에서 빠진 털이 모두 얼굴에 붙인 듯 온통 수염이다. 그의 남부 악센트는 두어 마디마다 톤이 치솟고는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어보다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 체험한 과정은 보고 느낀 것에 더하여 지수의 보충설명과 팸플릿을 읽고 얻은 지식이다.
잭 대니얼에서는 주원료인 곡물을 옥수수, 호밀, 보리 세 가지로 쓴다. 대부분의 술 제조업자들이 첫째로 꼽는 것이 물이듯이 잭 대니얼도 공장 위쪽 「동굴에서 솟아 흐르는 물(cave spring)」이 좋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자랑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지역에 유난히 많은 당단풍나무를 태워 만든 숯을 잘게 부수어 커다란 통에 담가놓고, 원액을 여기에 통과시켜 이 위스키만이 갖는 독특한 맛과 향을 낸다는 것이다.
이들 곡물이 이스트와 물과 한데 섞여 발효되며 부글부글하는 모습이 마치 옛날 할머니가 집에서 담근 술이 항아리 속에서 고일 때와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뚜껑을 빠끔히 열어놓으니 향기로운 술 내음이 코끝에 매달린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이드가 한 말이 "Walk slow, breathe deep."(천천히 걸으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시오)이었다. 냄새 맡는 것이야 공짜이니, 오랫동안 얼마든지 많이 음미하라는 뜻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는 과정은 그 뒤로도 더 있었다. 위스키 액이 구리 관의 바늘만큼 작은 구멍을 통하여 방울방울 맺혔다가 떨어져 약 2미터 정도 숯 더미를 통과하는 동안 그 성분을 흡수하며 흘러내린다. 이 과정이 잘 보이도록 거대한 통의 뚜껑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다. 혼자 들어 올리기에는 버거운 이 덮개를 잠깐 들어 올릴 터이니 그 사이에 코를 통 가까이 박고 있다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 확 끼치는 냄새를 최대한 깊이 들이마시라고 한다.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은 건장한 남자 가이드가 걸려 공짜냄새를 더 맡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앞 팀은 나이 든 여자가이드가 알아듣지 못하는 설명을 더 꼼꼼히 했을지 몰라도 틀림없이 이 과정은 생략되어 위스키 향을 음미해 보는 실익은 우리가 더 누렸을 것이다.
병에 담아 레테르를 붙이고 한 상자 6병이 포장되어 나오며 위스키는 상품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큰 술통에 담겨 한 해 두 해 묵히며 세월을 기록하는 저장창고를 통과하여 천천히 걸어 나오며 한 번 더 깊이 숨 쉬어 보는 것으로 1시간가량의 산업시찰관광은 끝났다. 앞으로 잭 대니얼을 대할 때는 술맛에 더하여 이와 같은 생산과정과 140년 가까이 되는 역사를 둘러본 추억이 추가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내시빌 근교 허미티지(Hermitage)는 미국 7대 대통령이었고 20달러짜리 지폐에 초상이 그려진 주요 인물 앤드루 잭슨이 살던 곳이었다. 차지하고 있는 땅도 어디서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다. 본 채인 맨션 외에도 노예의 오두막, 정원, 가족묘지, 불탄 적이 있는 교회 등, 12달러로서 만만찮은 입장료만큼 볼거리도 많다. 이곳에서도 여기저기를 천천히 걸으며 가슴을 크게 벌리고 숨을 깊이 쉬며, 맑고 신선한 공기와 함께 역사를 되돌아보는 유익한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