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친구들
나는 초등학교를 두 곳 다녔다. 도시 학교에 입학하고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25가 그렇게 만들었다. 48년 인천의 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으로 진학, 3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 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1년 가까이 외가 동네에 피란하여 무위의 나날을 보내다가 조부 손에 이끌려 선대의 고향인 산골 청라초등학교에 편입했다. 내처 다녀 그곳에서 졸업했다.
6.25 이 전의 동네 친구나 학교를 같이 다닌 아이들과의 기억은 아주 희미하다. 부모님이 무던하고 가장 가깝게 지낸 이웃의 일남이. 그의 이름과 앞머리에 큰 가마가 선명하게 있었다는 것 외에는 모습조차 떠올려지지 않는다. 풀숲에서 개구리 잡아 기절시켜 되살려보기, 풍뎅이 다리를 반쯤씩 끊어 뒤집어 놓고 허우적거리게 하기, 땅강아지 실로 묶어 다루기 등 각종 악행을 공모했던 동무들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들의 면모는 도무지 기억에 없다.
전쟁을 계기로 우리는 그곳을 떠났고 전후에라도 찾아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알고 지냈지만 7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많은 친구와 친지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어디선가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세상을 뜬 이들도 많을 것이며, 또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청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며 다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다. 그 후 삶의 터전은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선대의 고향이며 내 어린 시절의 몇 년을 보낸 마음속의 고향 청라는 그리움으로 쌓이게 되었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곡의 「동무생각〔思友〕」이라는 가곡을 들으면 나는 늘 고향과 고향 친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노래 가사에는 청라언덕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내용이 친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랫말 속의 청라언덕은 대구의 어느 곳을 지칭하고 동무를 생각하는 애틋함은 내가 떠올리는 친구 생각과는 다른 것일지 모르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청라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2개 반이었다. 남자만의 반과 정확한 숫자는 기억되지 않으나 여자 40에 남자 20 정도의 혼성 반이었는데 나는 운 좋게도(?) 3, 5학년은 여자 반에 끼었다. 그래서 여자애들과는 말을 섞지 않았어도 서로 간에 잘 아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면 내의 소리골 갬발 내현 복병이 서산밑 등 마을에는 한산 이 씨, 전주 이 씨와 우리 광산 김가가 주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도 친인척들이 즐비했다. 달리기를 잘하고 활발했던 복수는 같은 연배의 얌전한 고모 영주와 단짝처럼 손잡고 다녔다. 복수는 나에게 조카 벌의 종갓집 여학생이다. 그러나 제기차기의 달인이었던 재완이는 할아버지 벌의 높은 항렬이었다. 외발차기 양발차기 발 들고 차기의 삼종세트를 선 자리에서 한없이 찰 수 있는 아이는 재완이 외에는 없었다.
제기 이야기를 하자면 가전 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덩치가 있고 활달한 편이지만 온순하여 누가 시비를 걸면 늘 고개를 젖히고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지,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다툼에 밀리거나 궁지에 몰리면 언제나 제기 종이나 엽전을 갖다 준다고 하며 그 자리를 모면하고는 했다. 면사무소에서 파지로 나오는 미농지는 조선 말기에 사용했던 엽전과 함께 제기 만드는 주요 재료였다. 가전이는 자기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킨 일이 한두 번은 있었던가, 대부분 그러한 말을 한 사실조차 잊는 듯했다. 가져왔느냐고 추궁하면 몇 개 준다고 했지 물어보고 엽전 한 개라고 하면 다음 날 두 개를 가져온다 했고, 제기 종이 다섯 장이라 대면 다음에 배로 열 장을 꼭 갖다 준다 했다. 그렇게 해서 숫자는 점점 불어났지만 가져오는 것을 본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와 새로운 약속을 하고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우리는 숫자가 늘어가는 것에 취하고 즐겼는지 모른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에 혹시라도 출연한다면 꼭 찾아보고 싶은 친구가 경진이다. 이 친구 이름을 말할 때 잠시 망설이게 되는 것은 이름이 세 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3,4년 사이에도 전학 갔다 돌아오기를 여러 차례였는데, 어떤 사유인지 그때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이름이 이경진이었는데 사라졌다가 돌아오더니 흥진이라 했다. 그 뒤로 이 척이라 부르라 했고 졸업할 때는 다른 학교로 다시 전학 가 졸업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학교의 명물이었다. 명사(名士)라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키는 크지 않지만 다부진 체격에 걸걸한 목소리로 타고 난 이야기꾼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몸짓 손짓에 곁들여 목소리를 바꿔가며 동화구연을 잘했고 웅변대회가 있다 하면 항상 대표선수로 뽑혀나가고는 했다.
6학년이 되며 진학반과 아닌 반으로 재편성했는데, 진학반에 여학생은 옥자가 유일해서 거의 남자반과 같았다. 진학반이 크게 다른 점은 주로 1시간 정도 과외를, 모의고사 치르고 문제 풀이와 채점을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항상 세 명이 특출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고만고만했던 것 같다. 이서라는 아이가 항상 1등을 하고 효제와 내가 번갈아 2,3등을 했다. 이서는 키도 크고 수려한 외모에 학업성적이 특출하니 반장을 맡아놓고 하고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효제는 대전으로 나는 서울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지만, 이서를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은 집에서 다니자면 가장 가까운 대천중학교에 응시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대천중학에는 열명 정도가 합격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마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9킬로나 떨어진 학교를 걷거나 좀 넉넉한 집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어른 자전거를 다리가 짧은 아이가 타자니 안장에 앉으면 페달이 닿지 않아 한 편으로 다리를 끼어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타는 것이었다.
나의 중학 진학과 함께 우리는 피란살이를 끝내고 3년 동안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며 친구들과 작별해야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게 되었다. 영영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지만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졸업 후 처음 만난 게 옥자이지 싶다. 만났다기보다 마주쳤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중학에 입학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인 것 같다. 등교를 위하여 동대문 부근을 지날 때 반대편에서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차림으로 오고 있는 여자 아이가 한 눈에도 옥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하였지만 남녀 간에 거리를 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그보다 내성적인 내 성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 마주치면 어찌 하나 고민도 했지만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뒤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거나 교류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만나 알고 지낸 게 춘근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춘근이는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자전거포를 하는 큰 형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연히 만나고 자주 보게 되어 교분을 쌓게 되었다. 초등학교에서 그의 기억은 대단한 개구쟁이어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소한 그가 새알을 꺼내려 까마득히 높다란 나무에 기어올라 가면 어미새는 주변을 맴돌며 피울음을 우는 것을 들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춘근이가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고 건장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나에게 용돈을 벌어서 쓰라고 아이 가르치는 자리를 알선해 주고 사정이 있어서 중도에 그만두었을 때 포기했던 돈을 기간 계산해서 받아주기도 했다.
진학반에서 공부하며 '톱 3'을 했던 우리 세 명이 6년 동안 소식도 없이 얼 굴 한번 못 보고 지내다가 같은 대학에서 만나 전공을 함께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대부분 서울로 올라와 있고 대전에도 그곳에서 따로 동창 모임을 가질 정도가 터 잡고 있었으며 고향을 지키는 숫자는 얼마 안 되는 듯하다.
학업을 마치고 군대 갔다 오며 사회인으로 자리 잡아갈 즈음에는 정기적인 동창회 모임도 갖고 대천중학을 다닌 친구들이 주축이 된 10여 명의 친목모임에 영입되어 다달이 만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고향소식, 다른 동창들 근황이 자연스레 입에 오로 내리고는 한다.
제기의 달인 재완이는 목사가 되었다 하고 그때 마주치고도 모른 체하고 지나쳤던 옥자는 동창회 자리에서 그 일을 기억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듯 나를 바보라고 낙인찍었다. 만나보고 옛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경진이는 충주엔가 살았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해도 80대에 들어서니 의욕은 감퇴되고 기력이 빠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1년에 한 번 유지하던 동창회는 슬그머니 없어지고 다달이 갖던 청라회도 연락을 열심히 하던 친구가 코로나가 한창일 때 기저질환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중단되었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역할을 끝내고 퇴장하듯 하나둘 사라지니 주변이 쓸쓸하고 허전함을 느낀다. 이젠 영원히 작별하는 것인가?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생각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