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다시 선택하기
흉내 낼 수 없는 정성
지금이야 전국의 초중고교에 교직원과 전교생 모두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급식 시설이 있다. 요즘도 전교생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교가 있다고 듣긴 했지만, 그때처럼 강압적이지는 않다. 그때는 학생들은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를 챙겨서 등교를 했다.
어머니는 딸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 하셨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면 아무리 보온력이 좋아도 저녁이 되면 그 온기는 거의 남지 않는다. 점심만 도시락을 싸주시고, 저녁에는 직접 밥을 들고 정문으로 매일 오셨다. 갓 지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반찬도 점심과 겹치지 않도록 해 오셨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김이 없었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반찬들 덕분에 도시락 매이트들 까지도 풍성한 저녁을 먹었다.
김부각의 정성
도시락 뚜껑을 열어놓고 식사 기도를 했다.
눈을 떴더니 참깨 몇 톨과 튀겨진 찹쌀풀 가루만 남았다. "이거 이름이 뭐라고?"
"부각."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만드셨어?"
겨울이 되면 하루는 작은 방이 출입이 통제된다. 행주로 여러 번 방바닥을 닦고 어머니는 그 방 근처에 앉아 마른 김에 찹쌀풀을 묻히셨다. 그 위에 김 한 장을 덮어 다시 참쌀풀을 바르셨다. 아버지는 그 겹쳐진 김을 찢여지지 않게 조심스레이 들어 옮겨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통깨를 뿌리셨다. 그렇게 방을 가득 덮은 김들은 하루 밤동안 따뜻하게 건조되면 직화구이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면서 바닥 면에서 잘 떨어졌다. 충분히 건조가 된 김을 어머니는 기름에 튀겨내셔서 밥상에 바삭함을 더하셨다.
요즘이야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누구나 간식으로도 먹지만, 80~90년대에 김부각이라는 반찬을 먹어 본 집이 흔하지 않았다. 매년 도시락을 같이 먹는 친구가 바뀌기에 나는 김부각 전도사 같은 존재였다. 학령기 내내, 참깨가 입술에 붙은 친구들의 질문을 받았다. 돌아보니 참 그 시절, 정겨운 도시락 나눔이었다.
용납, 수용, 선택
2000년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모님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세를 살았다. 중간에 자가 살이도, 방이 3개인 셋집도 경험했지만, 반지하, 높은 언덕에 한 지붕에 여러 세대가 살아서 층간 벽간 소음이 심했던 좁은 집에서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았다. 그 좁은 곳에서 공부를 하기가 참 고되었다.
서로 소통을 굉장히 못하셨던 부모님은, 싸움이 잦았고, 폭력의 잔상이 여전히 기억에 있다. 육탄전을 말리고 다음날 시험을 위해 밤을 새워 공부해야 한 적도 있자.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그때 참 원망스러웠다. 들추자면 끝이 없고, 덕이 안 되는 부모의 과거를
나의 수치심과 직면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도를 걷는 사람으로서
덮어주기를 50여 년을 해오고 있는 것 자체가 은혜다.
갱년기란 전전두엽보다
파충류의 뇌라는 편도체의 극성이 심하다.
가스라이팅의 결정체인 어머니의 말 한마디를 덮고 넘기기가 이젠 힘이 들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본인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감당이 안될 때마다 분풀이로 딸에게 매질을 했던 어머니.
단 한 번도 손을 잡아준 적 없는 어머니.
감정의 유대고리가 없어도
그녀의 인성과 관계없이
항상 용납해 주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의 관성... 더 이어갈 힘이 없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감사를 적어보면서 정리정돈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