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
얼마 전 수업을 하는데 20년간 해 온 가르치는 일에 급격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매번 경험하는 일임에도 이제 정말 접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거의 첫 수업시간이었고 60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출석을 다 불렀다. 그런데 한 학생이 출석체크를 한 후 교실 밖을 잠시 나갔다. 그러고 나니 또 다른 학생이 나갔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어떤 파급효과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업 중간에 나가는 행동은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어차피 50분을 하고 쉬는 시간도 드리고 하니 그런 행동은 안 했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나가는 친구들은 이 60명 친구들에게 커피를 살 정도로 돈이 많은 친구로 이해하겠다. 커피를 사고 싶어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겠다. 그리고 그 커피를 꼭 사도록 내가 만들겠다"라고 말이다.
이 말에 그 친구는 마음이 상했는지, 수업시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조별 토론하는데도 학생들과 나누지 않고 토론시간의 물을 흐리고 있었다. 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살기어린 눈빛을 보내면서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친구들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 친구가 말할 차례가 되자, 톡에 자신의 의견을 남기고 너네들이 알아서 읽으라는 식으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토론을 마친 후 그 조에 있는 한 친구가 나에게 와서 참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로 인해 토론분위기가 어색하게 흘러간다는 말을 더하며 말이다.
이미 이 학생의 마음은 왜곡돼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학생의 마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풀 수 있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해의 여지도 내 잘못의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한번 마음이 뒤틀린 사람은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상대에 대한 거부반응과도 같은 이미지를 수합한다. 수합한 후 자신의 이견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끊임없이 명분과 논리를 만들어낸다. 그런 다음 자신이 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잊는다. 오로지 악을 위해 악을 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그림은 19세기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코르셋이나 지나친 장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복을 강조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선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의 패션은 클립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여성처럼 모자를 쓰고 풀밭에 앉아 있고 싶다. 그런데 눈이 온다. 내 마음이 스산하다.
선생의 일이 사양직업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이 일을 그만하게 되면 이 여성처럼 이쁘게 옷 입고 꽃밭에 앉아 근사한 음악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