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아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거리(距離)
능숙한 춤꾼은
나는 탱고를 출 줄 모른다. 그렇지만 탱고를 무지하게 좋아한다. 영화 <여인 향기>에 알 파치노의 춤을 보고 완전히 그에게 빠졌다. 삶이 무료할 때 영화 다시 보기를 하는데 <여인의 향기>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여인의 향기> 최고의 영화라고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꼽는 명장면은 프랭크 중령이 탱고를 단 한 번도 춘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탱고를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향기만을 통해서 여자의 모든 걸 알아버리는 초능력을 가진 프랭크 중령은 탱고를 출 때 절대 파트너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좀 거리를 두고 춘다고 해도 반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다.
(출처: 다음 이미지)
알 파치노 덕분에 탱고 음악에 빠져들면서 다른 춤꾼도 그런지 찾아보았다. 살사. 블루스. 지르박(jitterbug) 등등 사교춤 명장면을 유튜브를 통해 접했는데 유능한 춤꾼은 공통적으로 파트너와 반걸음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야만 상대가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일이나 춤을 추는 것이나 더불어 같이 가기 위해서는 <반걸음>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너무 앞서가면 독불장군이 될 수 있고, 너무 뒤처지면 내가 힘들다. 웅숭깊은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려면 필요한 간격 <반걸음>. 당분간은 이 화두를 붙들고 있어야 할 거 같다. 나를 위해서.
손잡아 줄 수 있는 거리(距離)만큼
젊었을 때는 배우자가 서로 밀착되어 있어야 좋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상대방이 넘어지려 할 때 손잡아 줄 수 있는 만큼이 최적의 거리(距離)라고 본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너무 밀착되어 모든 걸 알려고 들면 그때부터 갈등이 생기고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너무 가까워 숨소리까지 듣게 되면 좋은 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만 눈에 걸리기 마련이다. 또 손잡아 줄 수 있는 거리보다 멀리 나가도 문제다. 정(情)이 떨어나가고 무관심이 익숙해져 어느 순간부터 낯선 타인이 된다. 그래서 손잡을 수 있는 거리만큼의 간격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직업상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고민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얼마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간격의 정도다. 나는 가깝다고 다가서는데 상대방이 멀어졌다고 여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밀착하는 거 아닌가 경계를 할 수도 있다. 적정 거리 계산이 언제나 숙제였는데 <반걸음>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상대방과 거리가 너무 먼 건 아닐까? 혹은 너무 가깝지 않은가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반걸음>의 보폭이 사람마다 다르니 그때그때 맞춰가면 되니까.
누가 내게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묻는다면 46cm에 동그라미를 칠 것이다. 내 반걸음의 폭이 그 정도니까. 이순필 시인도 <휘감기지 않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한 오십 미터쯤 저기에 두고 바라볼 수 있다면 휩쓸리지 않게, 휩쓸리지 않게’라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이 시간 “나와 나 사이에 거리(距離)는 몇 센티일까?” 헤아려본다. 나와 나 사이도 <반걸음>의 간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금 떨어져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조금 물러서서 바라보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