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4화

역사소설 제4화 - 천년의 낙조 불꽃 속에 저물다

by 김백



제4화 천 년의 낙조, 불꽃 속에 저물다




월성 남쪽 주작문(朱雀門)이 비명을 질렀다. 신라의 정문이 뚫린 것이다. 거대한 파성퇴가 성문을 짓이길 때마다 천 년의 위엄은 붉은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무너지는 성벽 위에서 수성장(守城將) 박효렴은 쏟아지는 화전(火箭)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갑주를 적신 피가 자신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처절한 난전이었다.


“성문을 사수하라! 이곳이 뚫리면 사직은 끝이다! 물러서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박효렴은 이 빠진 칼날을 고쳐 잡으며 성벽을 타고 오르는 백제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왕실의 마지막 방계로서, 그는 신라의 자부심을 몸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절망이었다. 백제의 선봉장 상귀(相貴)가 이끄는 기병대가 이미 해자(垓字)를 가득 메우고 성벽 아래 발 디딜 틈 없이 집결해 있었다. 상귀는 피 묻은 도끼를 달빛 아래 휘두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박효렴! 아직도 그 썩은 알의 후예들을 믿는가! 성문을 열어라. 그러면 네 목숨줄만은 대왕께 구걸해 보리라"


“닥쳐라, 이 호로(虎狼) 자식들아! 신라의 땅은 너희 같은 도적떼에게 내어줄 흙 한 줌 없다!”


박효렴이 검을 비껴 잡으며 상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상귀의 육중한 대부(大斧, 큰 도끼)가 파성추처럼 내리눌렀으나, 박효렴은 찰나의 순간 몸을 비틀어 횡격(橫擊)으로 응수했다. 쨍그랑! 쇳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박효렴은 격자(擊刺)의 기세를 몰아 상귀의 가슴팍을 파고들었지만, 상귀는 광기 어린 웃음과 함께 도낏자루로 박효렴의 어깨를 밀쳐냈다.


굉음이 서라벌의 하늘을 갈랐다. 주작문이 비명 속에 무너져 내렸다. 갈라진 문틈으로 들이닥친 것은 굶주린 짐승의 파도였다. 상귀의 기병들이 질풍처럼 성안을 집어삼켰다. 박효렴은 쏟아지는 말발굽 사이에서도 적의 말다리를 칼로 끊어내며 저항했으나, 사방에서 날아든 창날에 온몸이 꿰뚫렸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불타오르는 정전 처마 끝에 걸려 있었다.

금역(禁域)의 경계는 말발굽에 허무하게 짓밟혔다. 왕조차 조심스럽게 걷던 정전의 박석 위로 흙탕물 범벅의 가죽신들이 들이닥쳤다. 정전으로 가는 회랑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평소 유학의 도리를 논하던 시중 김락과 아찬 박수문은 위엄을 던져버린 채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었다.


“김 시중, 이쪽이오! 뒷문으로 나가면 남산으로 숨어들 수 있소!”


박수문이 관복 자락을 걷어 올린 채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하지만 김락은 이미 공포로 다리가 풀려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미 늦었소! 백제의 창귀(槍鬼)들이 궁을 에워쌌단 말이오! 차라리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합시다!”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왕실 서고인 집현관(集賢館)이 불길에 휩싸였다. 신라 천 년의 지혜를 기록한 수만 권의 죽간과 비단 두루마리들이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한 줌의 지식조차 야만의 도끼질 앞에서는 무력했다. 불탄 종이들이 서라벌의 밤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눈발처럼 날렸다. 그것은 마치 공중으로 흩어지는 신라 역사의 만장(輓章) 같았다.

내명부의 수난은 참혹했다. 궁궐의 높은 담장에 갇혀 평생 햇빛조차 보지 않던 여인들이 병사들의 거친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나왔다. 오색 비단 치마는 핏물 섞인 진흙바닥을 구르며 찢겨 나갔고, 겁에 질린 여인들의 눈동자에는 무너져 내리는 신라의 불길이 일렁였다.

상귀는 정전 마당 한복판에 서서 피 묻은 도끼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모두 끄집어내라! 박 씨 놈들의 금은보화는 물론, 그 고귀하신 왕비와 공주들도 단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오늘 밤 서라벌은 백제의 무대가 될 것이다!”


정전의 마지막 계단은 근위병들이 육벽(肉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제 키만 한 창을 휘두르던 소년병의 어깨가 적의 칼날에 으스러졌다. 쏟아지는 칼을 맞고도 소년은 길목을 비키지 않았다.


"전하... 부디... 보존하소서..."


소년의 고개가 꺾였다. 소년의 시체 위로 백제군의 장화가 무수히 짓밟고 지나갔다.


살육의 비린내와 조롱 섞인 포효가 정전의 문턱을 넘어 경애왕의 폐부까지 파고들었다. 왕은 어둠 속에서 성벽이 무너지는 모든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박효렴의 찢어지는 단말마, 상귀의 광기 어린 웃음, 서고에서 날아든 매캐한 연기와 신료들의 비겁한 발소리까지. 그 모든 소리는 폐부를 도려내는 칼날이 되었다. 금역(禁域)이라 믿었던 정전마저 유린당하는 광경 앞에서 왕은 천 년 사직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이었는지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이제 떨리는 두 손바닥에는 신라의 권위도 국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불길은 정전의 처마를 집어삼키며 날름거렸다. 검은 연기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왕의 시야를 흐렸다. 뒤틀리는 기둥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파괴의 정점에서도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금역의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존엄 하나뿐이었으나, 그는 그 잔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짊어져야 할 최후의 운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라벌의 심장이 난도질당하고, 천 년의 역사가 불꽃 속으로 소멸해 가는 순간, 궁은 더 이상 신성(神聖)한 성역이 아니었다. 왕은 그 무너지는 폐허 위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처절하고도 숭고한 주권자의 위엄을 입술로 깨물고 있었다. 디시 담장이 쿵쿵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것은 한 시대의 영광이 무너지는 소리였으며 장차 피로 기록될 새로운 비극의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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