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5화

# 역사소설 제5화 - 神도 외면한 멸망의 제단

by 김백




제5화 : 神도 외면한 멸망의 제단




왕은 눈을 감았다. 재위 3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전조(前兆)들이 명멸했다. 그것은 신(神)의 가혹한 문장이자, 종말의 기록이었다.


재위 첫해부터 대지는 평온을 거부했다. 서라벌 땅 밑에서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척이는 듯한 둔탁한 울림이 계속됐다. 지진은 예고 없이 궁궐 기와를 떨어뜨리고 첨성대의 돌 틈을 벌려놓았다. 밤마다 들려오는 지축의 뒤틀림이 왕의 수면을 난도질했다. 대신들은 지기가 쇠했다며 대규모 제례를 권했다. 그러나 왕은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은 땅이 아니라, 신라라는 거대한 뿌리가 송두리째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패의 정점은 도성 곳곳에 넘쳐나는 기괴한 향락이었다. 나정(蘿井)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해 신라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도, 진골 귀족들은 금입택(金入宅)에 틀어박혀 금술잔을 부딪쳤다. 왕은 밤마다 변복을 하고 도성을 돌았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천 년 사직의 위엄이 아닌, 권태에 찌든 타락이었다. 지방에서 자식을 파는 백성들의 곡소리가 하늘을 찔러도, 서라벌의 고관들은 온실에서 이국의 꽃을 키우며 사치를 탐닉했다.


“전하, 나정의 우물이 붉어진 것은 지기가 쇠한 탓이 아니옵니다. 신라의 뼈가 녹아내리는 녹물이옵니다.”


노학자의 탄식은 왕의 심장을 후벼 팠다. 왕은 직접 나정으로 향했다.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났다던 성지는 더 이상 생명의 발원지가 아니었다. 우물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기괴한 거품을 내며 일렁였다. 왕은 우물가에 서서 손을 담가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서늘했으나 가슴속에서는 불덩이 같은 공포가 치밀었다.

그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쌓여온 귀족들의 탐욕과 무능, 그리고 더 이상 나라를 위해 검을 들지 않는 화랑들의 타락이 빚은 녹물이었다.


서라벌이 포위되기 닷새 전, 왕은 국운을 빌기 위해 마지막으로 황룡사를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신(神)의 응답이 아닌, 거대한 불꽃이었다. 국사(國師) 혜암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이었다. 혜암은 왕의 행차를 향해 마지막 큰절을 올린 뒤, 나라의 업보를 짊어지겠다며 스스로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왕은 불타는 법당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 지옥도를 목도했다. 불길이 살점을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노승은 미동 없이 낮은 음성으로 대동다라니를 읊었다. 타오르는 불꽃은 비명 대신 거룩한 광휘가 되어 법당을 비췄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공양조차 끝내 번뇌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법당의 불상들은 자비로운 미소 대신 슬픔을 머금은 채 침묵했다. 왕은 혜암의 눈에서 흐르는 핏빛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부처가 신라를 향해 흘리는 마지막 연민이었다.


일찍이 왕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거대한 괴물이 되었던 미실(美室), 그녀가 세운 서슬 퍼런 기강은 이제 실핏줄 하나 남지 않고 끊어져 있었다. 왕은 밤마다 환각처럼 미실의 초상화가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타락한 화랑들을 거느리고 서라벌의 골목을 가로지르며,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직을 왜 지키려 하느냐고 오만하게 묻는 듯했다. 그녀가 국가의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냈던 화랑의 ‘골기(骨氣)’는 이제 먼지 앉은 기록 속에나 남은 전설이었다. 고결했던 임전무퇴의 맹세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졌으며, 화랑들은 전장 대신 궁궐 뒤뜰에 모여 분(粉)을 바르고 연시(戀詩)를 주고받는 유흥에 골몰했다. 미실의 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 장엄한 기개는 이제 저잣거리의 노랫말보다 가볍게 흩어지고 있었다.


황룡사 구층탑의 그림자가 서쪽으로 기울고, 남산의 소나무들이 하룻밤 사이에 말라죽은 것은 하늘의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국가에 내리는 마지막 사형선고였다. 사찰의 종소리는 예불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사직의 만가(挽歌)였고, 스님들의 가사는 피로 물든 듯 붉었다.


“이것이 정녕 짧은 재위의 천명(天命)이란 말인가.”


왕은 홀로 편전에서 자문하곤 했다. 재위 3년, 그는 부패한 대신들을 숙청하고 기강을 바로잡으려 애썼으나 이미 암(癌)은 전신에 퍼져 있었다. 견훤의 칼날이 대야성을 무너뜨리고 서라벌의 목을 조여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락한 귀족들이 심리적 성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꿈속에서 시조 혁거세를 마주했다. 그는 피가 차오른 나정(蘿井)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으며 왕을 응시했다. 그 뒤로 미실이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채 타락한 화랑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고, 노승들은 눈물을 흘리며 경전을 불태웠다. 그들의 눈빛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우라’는 준엄한 명령이었다. 천 년의 영화가 쌓아 올린 탐욕의 찌꺼기를 이제 그만 불길 속으로 던지라는, 가장 가혹하고도 필연적인 선고였다.


왕은 비로소 깨달았다. 정전을 집어삼키는 불길과 내전의 비명은 돌발적인 재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3년 동안 보아 온 타락한 향락과, 신(神)마저 고개를 돌린 참혹한 과보(果報)였다. 신라의 이름은 이미 하늘의 명부에서 지워졌고, 자신은 그 마지막 폐허 위에서 천 년의 기록을 매듭지을 필경사(筆耕士)에 불과했다.


폐부를 파고드는 연기 속에서 왕은 비로소 평온을 찾았다. 이제 자신의 피로 써 내려가야 할 마지막 소명이 선명해졌다. 횃불의 붉은 광휘가 창호지를 넘어 눈동자에 맺혔다. 그것은 나정의 우물물보다 진하고 소신공양의 불꽃보다 확실한,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완성형이었다.


# 제6화가 곧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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