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3화

역사소설 제3화 - 불타는 천년의 밤

by 김백




제3화 - 불타는 천년의 밤






대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음하고 있었다. 지하에 잠든 용들이 뒤척일 때마다 그 진동은 기둥을 타고 왕의 침소까지 흔들어댔다. 경애왕은 밤잠을 설치다 소스라치듯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기둥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마치 천 년 사직이 마디마디 부서져 내리는 비명 같았다. 왕은 무너져 내리는 국운 앞에 차마 잠들지 못하는 밤을 홀로 뒤척였다.


왕비 박 씨가 다가와 왕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여미었다. 그녀의 눈에 고인 공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물 같았으나, 왕은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어둠만 응시할 뿐이었다.


황촛불에 비친 그녀의 살결은 백목련 꽃잎처럼 희고 아름다웠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쪽머리며 그 아래로 흐르는 가녀린 목선, 가슴께에서 파르르 흔들리는 패옥(佩玉)까지. 왕의 곤룡포 옷자락이 그 고운 손끝에서 사그락거리며 슬픈 소리를 냈다.


포석정의 차가운 기운이 침향 사이로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왕비는 지아비의 옷매무새를 여미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일렁였다.

왕은 이미 고려 왕건에게 사신을 보낸 뒤였다. 대야성을 잃은 신라에게 남은 것은 천 년 사직의 위엄이 아니라 생존을 향한 처절한 구걸뿐이었다. 내전 안은 엇갈린 명분과 비겁한 체념이 뒤섞인 대신들의 설전으로 어지러웠다.


“전하, 고려 왕은 답이 없사옵니다. 원군을 기다리기보다 이제라도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 항전해야 하옵니다!”

젊은 무장의 처절한 외침을 끊고 아찬 김자경이 차갑게 앞으로 나섰다.

“항전이라니요. 대야성이 무너진 마당에 서라벌의 성문이 견훤의 철퇴를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헛된 피를 흘리느니, 차라리 견훤에게 머리를 숙여 백성들을 보존함이 마땅하옵니다. 그것이 진정 천 년 사직을 보전하는 마지막 길이옵니다!”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효겸이 얼굴에 튄 선혈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치며 김자경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그가 내리 뻗은 칼날 끝이 김자경의 발치를 서슬 퍼렇게 겨누었다.


“김자경! 적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어찌해서 사직을 잇는 길이라니, 네놈이 정녕 신라의 신하더냐! 내 부하들이 흘린 피가 대야성 바닥에 채 마르지도 않았다!”


충절과 체념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에 왕의 머릿속은 아득했다. 무너지는 사직을 붙잡으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옥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고려 왕은 정녕 답이 없느냐? 전령이 당도할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느냐.”


왕의 채근에도 신하들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숙였다. 왕건의 구원 약속은 바람보다 가벼워 붙잡을 길 없었다. 왕은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다시 밀서를 적어 내려갔다.


‘고려와 신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형국이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오. 서라벌의 성문이 무너지면 그 칼날이 다음은 어디를 향하겠소. 부디 천 년 사직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정예병을 보내 이 위태로운 불길을 꺼주시오'.


화선지 위로 먹물이 번져갈 때마다 왕의 가슴에도 시커먼 절망이 깊게 배어들었다. 왕비가 떨리는 손으로 왕의 소매를 간절히 붙잡았으나, 왕은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붓끝에서 토해내듯 적힌 글자들은 이미 기울어버린 국운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왕이 밀서를 끝내기도 전, 궁궐 밖에서 짐승의 함성이 대지를 찢으며 터져 나왔다.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는 그토록 기다리던 고려의 군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쪽 지평선을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 백제의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효겸이 핏발 선 눈으로 다시 검을 거머쥐며 울부짖듯 외쳤다.


“전하, 고려의 군마는 오지 않습니다! 백제의 화로(火弩)가 내뿜는 불화살이 이미 월지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왕은 대답 대신 왕건에게 보내려던 밀서를 움켜쥐었다. 왕비는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아 왕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효겸은 피 묻은 칼자루를 쥔 채 바닥에 엎드려 천장을 향해 통곡했다.


그때, 거대한 성문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내전까지 들렸다. 문창살을 물들인 붉은빛은 저무는 낙조가 아니라 견훤이 치켜든 피의 횃불이었다. 밤공기를 가르는 비명 속에서 몰락의 그림자가 길게, 아주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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