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2화

역사소설 # 2화 - 거룩한 연모의 예(禮), 비려의 칼춤

by 김백



제2화: 거룩한 연모의 예(禮), 비려의 칼춤


견훤이 옥좌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을 긁는 대검의 파열음이 전각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마침내 왕의 코앞에 멈춰 선 견훤이 피 묻은 칼날을 들어 경애왕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옥좌를 에워싼 백제의 장수들은 승리를 확신한 듯 거친 숨을 내뱉었고, 바닥에 엎드린 대신들은 곁눈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살피며 사시나무 떨듯 설핏거렸다.


그 찰나, 왕의 병풍 뒤에서 어둠을 찢는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슈슈—욱!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단도 세 자루가 견훤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견훤이 고개를 돌려 칼날을 피하자,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검은 복면을 쓰고 양손에 서늘한 장검을 든 여인, 후궁 비려(飛麗)였다.


“어떤 쥐새끼인가 했더니, 왕의 품에 숨어있던 꽃이었느냐?”


견훤의 조롱에도 비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제의 심장부에 침투해 단칼에 장수의 목을 취하고 사라졌던 전설적인 자객, ‘무심(無心)’의 딸이었다. 아비는 그녀에게 나라를 지키는 법이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적의 숨통을 끊는 자객의 초식(招式)을 물려주었다.


환갑의 나이에도 태산 같은 위용을 자랑하던 견훤이 대검을 치켜들자, 비려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검은 옷자락이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거렸으나, 그 끝에 매달린 서늘한 검기(劍氣)는 독사처럼 치명적이었다. 자객의 피를 물려받은 천부적인 기질이 깨어난 듯, 그녀의 검술은 이미 기세 면에서 노회 한 군주 견훤을 압도하고 있었다.


양손의 검이 현란한 비취색 궤적을 그리며 견훤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견훤의 육중한 대검이 채 따라붙기도 전에 비려의 검날은 갑옷의 틈새를 정교하게 꿰뚫고 지나갔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짐승 같은 직관을 길러온 견훤조차,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이 예리하고도 거룩한 검로(劍路) 앞에서는 당혹감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그 광경을 목도하며 숨을 멈췄다. 옥좌 앞에서 처절한 칼춤을 추는 저 여인이 정녕 자신이 사랑하던 비려란 말인가. 왕의 기억 속 비려는 미풍에도 바르르 떨리던 가냘픈 꽃가지였다. 평소 말수가 적어 뜰에 핀 매화와 눈을 맞추며 오후를 보내던 여인이었고, 왕의 곁에서는 비단결보다 곱고 여린 꽃잎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견훤의 칼날 앞에서 온몸이 찢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매화 향기가 머물던 고운 살결 위로 서슬 퍼런 검기가 들이닥쳐 붉은 꽃잎 같은 핏방울을 흩뿌렸다. 피칠갑이 된 손마디로 칼자루를 악착같이 움켜쥔 그 기개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연약한 육신 아래 그녀가 숨겨온 것은 자객의 칼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을 향한 지독한 헌신이자, 무너지는 사직을 대신해 스스로 부서지겠다는 각오였다.


에워싼 견훤의 부하들은 이 예기치 못한 칼춤에 숨을 죽였다. 전설적인 자객의 초식 앞에 백제의 호랑이가 고전하는 광경에 정전 안은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엎드린 신하들은 이 처절한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바라보며 마른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나 전장의 노련함은 끝내 기술의 예리함을 넘어섰다. 견훤은 비려의 변칙적인 공격을 묵집 한 힘으로 밀어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비려의 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휘어지던 찰나, 견훤은 거대한 대검을 방패처럼 세워 이를 막아낸 뒤 어깨를 내질러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육중한 힘에 밀린 비려의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비려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기력을 모아 견훤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공격이라기보다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삼은 최후의 투신이었다. 견훤의 대검이 비려의 가슴을 깊숙이 관통하는 순간, 비려의 손에 쥐여 있던 마지막 단도가 견훤의 뺨을 스치며 선혈을 그었다.


“……!”


견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비려는 가슴을 관통한 칼날을 맨손으로 부여잡으며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옥좌의 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무너지는 나라에 대한 비탄보다, 지켜야 할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지독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비려의 몸이 천천히 바닥 위로 꺾여 내렸다. 자객의 딸로 태어나 왕의 여자가 되었고, 끝내 다시 자객의 칼을 든 채 스러지는 기구한 운명의 종말이었다.


“가련하구나. 신라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고작 계집의 칼 한 자루라니.”


견훤은 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차갑게 읊조렸다. 왕은 비려의 시신을 보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왕의 충격은 차라리 감각의 마비에 가까웠다. 옥좌를 거머쥔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 피를 흘린 고귀한 넋을 향한 참담한 통곡이었다.


비려가 흘린 선혈이 옥좌 밑바닥까지 번져나가며 붉은 물길을 만들었다. 그 물길은 훗날 포석정에서 흐르게 될 왕의 피를 예언하듯 서글프게 일렁였다.


파괴를 통해 찬탈자가 되려는 자와, 파멸을 통해 영원한 왕으로 남으려는 자. 신라의 천 년이 저물어가는 가장 긴 밤은 비려의 붉은 피와 함께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곧 3화가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