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 1화

역사소설 # 1화 - 서라벌의 가장 길었던 밤

by 김백





제1화: 서라벌의 가장 길었던 밤

서라벌의 밤은 더 이상 고요의 영토가 아니었다. 성벽 너머로 짐승의 포효 같은 함성이 밀려들었고, 밤하늘은 수만 개의 횃불이 내뿜는 연기로 질식할 듯 캄캄했다.


그 아비규환의 정점에 남궁(南宮)의 정전이 있었다. 침향 냄새가 머물던 전각 안에는 서늘한 죽음의 기운과 불길의 비린내가 뒤섞여 흘렀다. 천장의 화려한 개판(蓋板)은 번져오는 불길을 받아 피를 흘리는 듯 붉게 일렁였다.


정전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비릿한 피 냄새가 들이닥쳤다. 그 냄새를 앞세워 들어온 견훤은 아직 핏물이 식지 않은 칼날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칼끝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는 비명보다 날카롭게 전각 안을 난도질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갑옷이 부딪치며 서늘한 쇳소리를 냈다.


견훤은 투구와 어깨에 튄 선혈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왕을 향해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옥좌에는 신라 제55대 왕, 박위응(朴魏膺)이 앉아 있었다.


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턱을 두드리는 궁녀들의 비명과 병사들의 무자비한 살육 소리에도 그의 시선은 견훤의 발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옥좌의 용두(龍頭)를 거머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손끝에 걸린 공포는 신라 천 년의 침묵만큼이나 무거웠다.


옥좌 아래, 어두운 전각 구석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대신들이 엎드려 있었다. 영화를 누리던 입신양명의 상징들은 이제 살고 싶다는 비천한 욕망만 남은 육신에 불과했다. 어떤 신하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어떤 신하는 견훤과 눈이 마주칠까 관복 소매에 얼굴을 파묻었다. 패배자의 비굴함이 전각 바닥을 습하게 적셨다. 천하를 논하던 신하의 입들은 제 목숨을 부지할 한마디 말조차 찾지 못해 떨고 있었다. 왕의 곁을 지키던 마지막 촛불마저 꺼지자 어둠은 더욱 짙게 깔렸다.


“이것이 천 년 사직의 말로인가. 참으로 허망하구나.”


견훤이 옥좌 바로 밑까지 다가와 쇳소리 섞인 가래질을 내뱉었다. 그는 칼을 거두고 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백제의 호로(虎狼)라 불리는 견훤의 눈에는 승리자의 광기와,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던 서라벌의 주인을 향한 조롱이 가득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박위응, 그대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왕건의 구원인가, 서라벌의 기적인가? 보라, 그대가 믿었던 하늘은 이미 백제의 불꽃으로 뒤덮였다. 포석정에서 올린 기도는 저 연기 속에 흩어졌을 뿐이다. 여기 엎드린 신하들을 보라. 저들이 기다린 것은 구원이 아니라 주인을 바꿀 기회가 아니었겠느냐. 이미 사직의 기둥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그대 홀로 무엇을 붙들고 있는 것이냐.”


대신 중 하나가 경련하듯 어깨를 들썩였다. 왕은 그 처참한 군상을 시선 끝으로 느끼며 고개를 들어 견훤을 응시했다. 왕의 눈동자는 깊은 밤의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찬탈자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 포석정의 차가운 물길에 손을 씻으며 마주했던 역사의 준엄함이었다.


“견훤! 그대는 성문을 부수고 들어와 내 목에 칼을 겨눌 수는 있겠으나...,”


왕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떨림 없는 음성이 견훤의 승리감에 균열을 냈다. 옥좌 뒤편의 일월오봉도가 희미한 달빛을 받아 기묘한 위엄을 뿜어냈다.


“이 옥좌에 서린 서라벌의 혼까지 베지는 못할 것이다. 내 육신은 여기 있으나 나의 왕조는 그대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시간의 지층 속에 있다. 그대가 뺏은 것은 주인을 잃은 빈 껍데기일 뿐이다. 저들이 두려워 떠는 것은 그대의 칼끝이지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영원히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흠, 뭐라고?”


견훤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높은 천장에 부딪혀 기괴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그는 왕을 비웃듯 칼을 번쩍 들어 왕의 목덜미를 스쳐 옥좌 뒤의 기둥을 깊숙이 찔렀다. 나무가 찢어지는 파열음이 귓가를 울렸으나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태평성대는 끝났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나이며, 그대가 아끼던 모든 꽃은 내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밟힐 것이다. 그대는 그 비참한 파국을 눈도 감지 못한 채 똑똑히 지켜보게 될 것이다. 저 비겁한 신하들이 내 발등을 핥으며 그대 이름을 저주하는 꼴을 보라. 그대의 존엄이 어떻게 난도질당하는지 응시하라.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허락한 마지막 예우이자 처절한 대가다.”


왕의 곤룡포 소매 끝이 부르르 떨렸다. 사사로운 목숨에 대한 애착이 아니었다.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저 대신들까지 품어야 하는 주권자로서의 참담함이었다.


밖에서 건물이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진동이 전각을 흔들었다. 하지만 왕은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무너지는 사직의 끝에서 왜 이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지, 그 증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오르는 횃불이 두 사람 사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한 사람은 파괴를 통해 찬탈자가 되려는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파멸을 통해 영원한 왕으로 남으려는 자였다.


신라의 천 년이 저물어가는 가장 긴 밤, 그 비극의 서막이 서라벌의 대지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 2화가 곧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