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鮑石亭 上

시인의 문화기행 제8화

by 김백


포석정(鮑石亭) 上


[프롤로그]

이 글은 하이꾸 시인, 히사코 상과 눈 내리는 포석정을 답사하며 나누었던 대화를 바탕으로 기록한 문화기행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잊히기 마련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나눈 대화는 그날의 풍경과 함께 생생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신라의 비극적 종말과 그 이면에 숨겨진 『화랑세기』의 비밀을, 저와 히사코 상이 나눈 발걸음과 목소리를 통해 함께 따라가 보시길 바랍니다.



곡선이 빚은 미학


포석정 가던 날, 눈이 내렸다. 남녘에서는 보기 드문 폭설이었다. 일기예보는 그칠 줄 모르는 백기의 함락을 예보하고 있었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시간여행을 느리게 달리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부전역에서 동해남부선에 몸을 싣는다. 손을 내밀면 잡힐 듯 스쳐 가는 창밖의 산과 들. 느리게 사라지는 것들은 조조영화 스크린처럼 흘러가는 스산한 풍경이었다.


경주역 대합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데라구찌 히사코 상과 재회했다. 그녀의 곁에는 우리보다 스무 살은 젊어 보이는 여인이 기모노 차림에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서 있었다. 그는 배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한 일본식 인사를 건넸다.

대구에 거주하며 하이쿠(俳句)를 쓰는 여류 시인이자 매거진 동인이기도 한 히사코 상.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녀는 오래전부터 “경주 고적 답사 때 꼭 한번 동행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해오곤 했다. 평소 번역 등 여러모로 글 신세를 지고 있던 터라, 갑작스레 쏟아진 이 폭설은 어쩌면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택시는 우리를 포석정 주차장 근처의 한 식당으로 데려다주었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정갈한 궁중 음식은 감칠맛이 깊었다. 식사를 마치고 매표소로 들어서는데, 쏟아지는 눈이 시야를 가렸다. 능을 지키는 석상들도, 나무들도 묵묵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우리는 눈 쌓인 숲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우고 있었다.


“회사꼬 상, 이 풍경에서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오르네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그 유명한 문장 말입니다.”

내 말에 히사코 상이 걸음을 멈추고 안경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닦아내며 웃었다.

“정말 그렇네요, 선생님. 눈 속에 걷는 숲길이 정말 긴 터널 같아요. 마치 신라의 설국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에요. 니가타의 밤도 이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웠겠지요?”


그녀는 눈 덮인 숲을 가리키며 하이쿠의 한 구절을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바라보던 허무의 미학,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얗게 번뜩이던 니가타의 눈 덮인 풍경이 지금 경주의 고도(古都)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눈 속에 파묻힌 역사의 흔적을 좇으며, 소설 속 인물들처럼 아스라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물길에 흐르던 탐미적 시간


눈이 시야를 가릴수록 시간의 경계는 투명해지는 듯했다. 포석정의 구불구불한 석구(石溝) 앞에 서자, 서거정의 서글픈 탄식이 눈발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보네

유상곡수 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쏜 가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 서거정, 「십이 영가」 중에서



나는 석구 주변을 휘감아 도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히사코 상에게 나직이 물었다.

“회사꼬 상, 저기 흩날리는 눈발을 보세요. 마치 헌강왕이 신(神)과 함께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훠이훠이 춤을 추는 것 같지 않습니까?”

히사코 상은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전복 껍데기 모양의 돌확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 그래요 선생님. 아까 말씀하신 그 신비로운 춤, '어무상심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풍경이네요. 왕이 신의 춤을 따라 추었다는 그 기이한 전설이 이 눈보라 속에서 재현되는 것 같아요.”


나는 하얗게 덮여가는 석구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포석정은 본래 신라의 지배계급이 계곡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곡수(曲水)를 만들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일상 일영(一觴一詠, 술 한잔에 시 한 수)'**하며 국사의 피로를 달래던 격조 높은 휴식 공간이었다는 것을.


“선생님, 이런 문화는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라면서요?” 히사코 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은·주 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3월 삼짇날이면 물가에서 몸을 씻고 재앙을 막기를 기원하던 '상사일(上巳日)'의 풍습에서 유래했죠. 시객들이 지필묵을 앞에 놓고 굽이치는 물가에 둘러앉아 술잔이 자기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 한수를 지어야 했던 그 긴장감이 상상이 되시나요? 시를 못 지으면 벌주로 술 세 잔을 마셔야 했답니다.”

나의 설명에 히사코 상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하이쿠를 쓰는 저에게도 그런 벌칙은 꽤나 가혹하면서도 낭만적으로 들리네요. 하지만 선생님, 오늘처럼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엔 술 세 잔이 벌이 아니라, 추위를 녹여주는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제는 물 대신 하얀 눈이 고여가는 석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시(詩)를 실은 술잔이 유려하게 흘렀을 그 물길 위로, 이제는 무심한 세월과 차가운 눈송이만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태양의 잔상, 서라벌


히사코 상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 위에 남는 우리의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는 말의 뿌리가 중국의 왕희지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곳 포석정도 그 먼 길을 따라온 문화의 흔적이겠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서기 353년, 중국 란정(蘭亭)에 모인 명사들이 물가에서 시를 지었던 기록인 『난정회기(蘭亭會記)』가 그 시작입니다. 말하자면 고대의 아주 격조 높은 ‘동인지’ 서문이었던 셈이지요. 그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는 겁니다. 히사코 상의 고향인 일본에서도 나라(奈良) 시대의 헤이조쿄(平城京) 궁적지에서 이런 곡수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가 흥분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적 제1호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포석정 석구(石溝) 앞을 천천히 걸었다. 지금은 화려했던 별궁의 건물은 간데없고, 마른 전복(鮑) 모양을 닮은 차가운 돌길만이 눈을 맞고 있었다. 폭 35cm, 깊이 26cm의 이 작은 수로가 한 국가의 사적 제1호라는 사실에 히사코 상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이곳에 정말 지붕이 있는 건물이 있었을까요? 지금은 이렇게 돌길만 덩그러니 남아서 상상하기가 쉽지 않네요.”


나는 그녀에게 98년 발굴 당시의 흥미로운 비화를 들려주었다. 전복 ‘포(鮑)’ 대신 대포 ‘포(砲)’ 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비록 글자는 달랐으나, 그 조각 하나가 이곳에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지문이 기왓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자 그녀의 눈이 경탄으로 빛났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석구 위에는 멸망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헌강왕의 태평성대부터 경애왕의 비극적 죽음까지, 불과 38년 사이 임금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던 신라 하대의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 이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헌강왕 시절은 정말 꿈같은 시대였습니다. 서울에는 초가는 하나도 없고 거리에는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히사코 상은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런 태평성대가 있었군요. 아까 말씀하신 ‘어무상심무’ 이야기도 그렇고, 신하들에겐 보이지 않는 신의 춤을 왕 혼자 추었다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신비롭고 아름다워요.”


헌강왕은 단순히 술잔을 띄우는 왕이 아니라, 신과 교감하는 통치자였던 것이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나는 불현듯 처용의 그림자를 보았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향가 『처용가』의 배경 또한 헌강왕 시절이다. 아내를 범한 역신 앞에서 분노 대신 노래와 춤을 택했던 그 관용의 미학. 역신조차 감복하게 했던 처용의 얼굴이 지금 이 포석정의 흰 눈 위로 겹쳐지는 듯했다. 히사코 상은 우산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며 낮게 속삭였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헌강왕이 본 신의 춤도 처용이 추었던 그 너그러운 춤도, 모두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눈은 더욱 거세졌고, 포석정의 석구는 이제 완전히 하얀 함박눈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927년 11월의 겨울


포석정 주위를 감싸던 신비는 경애왕의 비극적 최후 대목에 이르자 시리게 내려앉았다. 나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육중한 눈송이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회사꼬 상, 사람들은 흔히 경애왕을 나라를 환락의 독에 빠뜨린 비운의 임금으로만 기억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가 다스린 기간은 고작 2년여에 불과했습니다.”


그 짧은 통치 기간, 신라는 도처에서 도적 떼가 창궐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나는 그녀에게 『삼국유사』에 기록된 또 다른 경애왕의 모습을 들려주었다. 즉위하자마자 황룡사에서 선승 3백 명을 모아 불경을 풀이하고, 친히 향을 피우며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빌었던 한 인간의 간절함을.


“견훤의 군대가 서라벌로 밀고 들어왔을 때, 왕은 정말 이곳에서 술잔을 돌리며 향락에만 빠져 있었을까요?”


나의 물음에 히사코 상은 대답 대신 눈 덮인 석구를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927년 11월, 견훤의 기습으로 왕궁은 유린당했고, 후궁으로 피신했던 왕은 결국 붙잡혀 자결을 강요받았다. 왕비가 능욕당하는 처참한 광경 속에서 신라의 천년 사직은 그렇게 포석정의 핏빛 바람과 함께 저물어갔다.


“아... 그 비극의 현장에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도 함께 있었던 거군요.”


내 설명을 듣던 히사코 상이 나직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경순왕 김부는 전왕의 시신을 서당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며 망국의 무거운 짐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나라를 고스란히 고려 왕건에게 바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홀연히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는 김부의 장자였다.

그는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느냐"며 아버지의 결정을 거세게 반대했다. 끝내 베옷(麻衣) 한 벌만 걸친 채 평생을 은둔하며 신라의 신비로 남았던 마의태자. 그의 서린 울분이 지금 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롭게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는 말없이 포석정을 한 바퀴 돌았다. 이제 전복 모양의 석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얀 눈 속에 함몰되어 갔다. 나는 발길을 돌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껏 우리는 포석정을 그저 향락의 연회장으로만 알았지요. 하지만 이곳의 발굴과 김대문의『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이 차가운 돌길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히사코 상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또 다른 진실이라니요? 선생님, 이곳이 우리가 알던 그런 연회장이 아니었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눈 덮인 남산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폭설은 이제 우리가 남긴 모든 발자국을 지우려는 듯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멸망의 슬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포석정. 그 차가운 돌길 위에 새겨진 신라의 마지막 비명을 뒤로하고 우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오해와 진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는, 하편에서 계속 나누기로 하지요.”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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