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
敍事時
김 백
I
보라, 태초의 알에서 깨어나 서라벌의 아침을 열었던 박혁거세와 천 년을 이어온 거룩한 선왕들의 신령(神靈)이 저무는 국운의 끝자락을 비통하게 굽어보노라
신덕왕의 성혈(聖血)을 이어받은 한 사내가 운명의 제단 위에 홀로 섰을 때 성좌에 좌정한 역대 군주들은 침묵으로 그에게 가혹한 가시 면류관을 내렸으니
그것은 권력의 향유가 아니라 무너지는 하늘을 어깨로 버텨내야 하는 거룩한 형벌이었어라 종묘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어 올린 그의 기도는 등불을 지키려 했던 파수꾼의 처절한 성찬(聖餐)이었음을 그 누가 알았으랴
II
오, 비통하도다! 서라벌의 녹을 먹던 일개 장수 견훤이 주인의 가슴에 배역(背逆)의 칼날을 꽂으며 짐승의 발톱을 드러내니 남산의 정령들과 천상의 선왕들조차 통곡하며 고개를 돌린 밤하늘마저 노하여 햇살을 검은 구름 속에 가두었도다
승리에 취한 야수는 인륜을 불살라 월성을 유린하고 왕비의 성결을 더럽히며 궁녀들의 비명을 승전가 삼으니 천 년의 향기는 피비린내 섞인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신라의 자부심은 갈가리 찢겨 나락으로 추락하였어라
III
비루한 역사의 붓끝은 포석정에 고인 눈물을 환락의 잔치라 조롱하며 승자의 편에서 비웃었으나 그것은 나라의 숨통을 붙들려 시조의 신명(神明)을 부르던 왕의 마지막 제례이자 장엄한 곡비(哭婢)였도다
왕은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유흥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 물길에 서라벌의 원혼과 백성의 안녕을 실어 보낸 것이니 비명 가득한 도성 안에서 그가 끝까지 움켜쥐었던 것은 보검이 아니라 사그라지는 민족의 불씨를 감싸 안은 가냘프고도 뜨거운 애민(愛민)의 손길이었어라
IV
적장의 오만한 입이 자결을 명령할 때 천 년의 선왕들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의 마지막 결단을 숭고하게 응시하였노라
사내가 구걸하는 생(生) 대신 고결한 죽음을 선택하여 만인의 머리 위에 우뚝 섰을 때 칼날이 목전에 닿아도 그의 눈빛은 북극성처럼 흔들림 없었으니 짐승의 포효가 궁궐을 뒤덮을수록 그는 더욱 높은 위엄에 올라 죽음으로써 가문을 씻고 피로써 나라를 수호하였도다
그 가파른 절벽 끝에서 인간의 공포를 짓밟고 일어서며 비로소 선왕들 앞에 진정한 왕이었음을 온몸으로 완성하였어라
V
이제 서라벌의 바람이 포석정을 훑으며 흐느낄 때마다 우리는 패배자의 비명이 아닌 배신자를 꾸짖는 갈채를 들으리니 ‘경애(景哀)’라는 슬픈 시호 속에 가두기에 그의 혼백은 너무도 찬란한 빛이었도다
역사는 이제 오욕의 붓을 꺾고 그 행적을 다시 기록하라 그는 나라를 망친 군주가 아니라 야만이 삼킨 역사를 제 몸 불살라 밝힌 영원한 태양이었음을
신라의 마침표를 눈부신 사리(舍利)로 빚어낸 성군 박혁거세의 정직한 후예 경애왕이 여기 살아 있음을 세상 모든 만물이 영원토록 노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