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6화

#역사소설 제6화 - 꽃잎 지던 밤의 궁전

by 김백



제6화: 꽃잎 지던 밤의 궁전




견훤이 피 묻은 칼을 박석 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난도질했다. 곧이어 백제 병사들이 붙잡아 온 왕비를 정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왕과 왕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견훤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흐트러진 왕비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왕비를 옆방 소전(小殿)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를 본 왕은 옥좌에 묶인 채 포효했으나, 발버둥 칠 수록 밧줄은 살을 파고들 뿐이었다. 견훤의 투박한 장화 소리와 왕비의 처절한 몸부림이 문턱 너머로 사라지자, 정전 밖의 아비규환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문 밖 회랑은 이미 짐승들의 놀이터였다. 백제 병사들은 약탈한 금식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도망치는 내관들의 등을 창으로 찔렀다. 그들은 내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래침을 뱉거나 보물들을 깨트렸다.


“살려주소서! 제발……!”


새파랗게 질린 궁녀들의 단말마는 날뛰는 광기에 파묻혔다. 한 병사가 넘어진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대검으로 비단옷을 찢었다. 쩍! 옷자락이 찢어지며 하얀 속살이 차가운 바닥에 드러났다. 병사는 저항하는 궁녀의 손목을 장홧발로 짓눌렀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발버둥 치는 몸을 파고들었다. 여기저기서 피범벅이 된 짐승들이 붉은 치맛자락을 덮쳤다. 서라벌의 고결함은 비명 속에서 처참하게 문드러졌다.

여인들의 비명은 밤하늘을 찢었으나, 그 소리를 들어줄 신도 지켜줄 군대도 서라벌엔 없었다. 치욕을 피하려 연못으로 뛰어든 궁녀들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일렁거렸다.

왕은 옥좌에 묶인 채 이 모든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얇은 창호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소전(小殿)에서 왕비의 서슬 퍼런 꾸짖음이 터져 나왔다.


“이것 놓으시오! 백제의 왕이 어찌 이리 비겁하단 말이오! 차라리 내 목을 치시오!”


왕비의 꾸짖음은 매몰찬 비명으로 변했다. 곧이어 견훤의 포효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천 년을 고결한 척 살아온 박씨가의 계집이 아니냐! 오늘 밤, 신라의 자존심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네 지아비에게 똑똑히 들려주마! 듣고 있느냐, 박위응!”


찌이익—.


비단옷 찢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신라의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옥좌에 묶인 왕은 눈을 부릅떴다. 보이지 않기에 더 선명한 환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소전의 꽃살문 위로 흔들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괴물처럼 왕비를 덮쳤다.


밖에서는 병사들이 여인들을 둘러싸고 술판을 벌였다. 풍악 대신 그녀들의 비명을 안주 삼아 즐겼다. 신라를 지탱하던 유학의 법도와 불교의 자비는 순식간에 야만의 배설물처럼 버려졌다. 도망치던 신료들은 관복을 벗어던지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으나, 이내 백제 기병들에게 짐승처럼 도살당했다.


“전하……! 전하, 제발 저를 죽여주소서!”


벽을 타고 넘어온 왕비의 절규가 왕의 심장에 대못처럼 박혔다. 왕은 손목이 끊어져라 밧줄을 낚아챘다. 옥좌의 용머리가 부서질 듯 울어댔으나, 왕을 옭아맨 무력함은 요지부동이었다. 짐승의 거친 숨소리와 왕비의 죽어가는 흐느낌이 정전을 메웠다.


왕은 정전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몸부림쳤다. 이마에서 터진 피가 얼굴을 덮었다. 붉은 피가 눈앞을 가렸다. 소전에서 왕비가 아끼던 백자 향로가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났다. 신라의 평화가 깨어지는 소리였다. 처절하게 들리던 왕비의 비명이 뚝 끊겼다. 찢어지던 울음이 그치고, 붉은 선혈이 창호지에 점점이 튀었다. 왕은 비로소 깨달았다. 신라는 이미 죽었다. 견훤의 욕망과 적병의 장홧발 아래 여인들의 존엄이 도살당하고 왕비가 스스로 혀를 끊어 정절을 지켜낸 이 순간, 사직의 혼은 영영 떠나버린 것이었다.


소전의 문이 열리고 견훤이 다시 나타났다.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었고, 거친 손에는 왕비의 붉은 허리띠가 전리품처럼 쥐여 있었다. 그는 옥좌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된 왕의 턱을 거칠게 낚아챘다.


“들었느냐, 박위응? 네 여인이 내지른 그 비절참색의 소리가 바로 신라의 만가(挽歌)다. 이제 알겠느냐? 천 년의 역사도, 그 고결한 뼈대도 권력 앞에서는 한낱 찢긴 비단 조각보다 못하다는 것을.”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이미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직과 연민, 그리고 자신의 존엄이 차례로 난도질당하는 지옥을 목도하며, 스스로를 장사 지낸 자의 황폐한 눈이었다.


문 밖에서는 여전히 여인들의 비명과 병사들의 광기가 불길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지키지 못한 자의 수치와 파멸. 그것은 승리자 견훤이 패배자 경애왕에게 내린, 죽음보다 모욕적인 형벌이었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로 매캐한 재가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옥의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