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소설 제7화 - 나정의 빛, 미실의 그림자
밧줄에 묶인 왕의 고개가 맥없이 꺾여 있었다.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차가운 정전 바닥에 고였다. 피가 튄 동경(銅鏡) 속에 비친 얼굴 위로, 어린 시절 우러러보았던 시조 혁거세의 초상이 겹쳐졌다.
왕은 거울 속에서 자신이 더 이상 한 인간이 아니라 천 년 신라의 마지막 밤을 적시는 한 점 그림자임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말 한 마리가 나정(蘿井)의 숲에 머리를 숙이면서 떠난 뒤, 그 자리에는 커다란 광채의 알 하나가 남아 있었다. 신라의 시작은 그토록 정결하고도 고귀했던 것이다.
‘나는 눈부신 알을 깨고 탄생한 자의 후예인가, 아니면 그 알을 깨뜨린 죄인인가.’
천 년 전, 어두운 이 땅에 빛을 가져왔던 시조의 피가 지금 자신의 혈관 속에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잔인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를 꿈꾸며 서라벌의 산과 들을 누비던 청년 위응. 그때는 푸른 수포(繡袍)를 휘날리며 말을 달렸고, 일월도(日月刀)를 차고 세상을 다 가질 듯 기개를 내뿜었다. 남산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신라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맹세하던 그 젊은 화랑의 심장은 지금의 비참한 박동과는 달랐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읊으며 임전무퇴를 다짐하던 소년은, 자신이 지켜야 할 사직이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짧은 재위 동안 편히 잠든 밤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달빛이 황룡사 구층탑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릴 때면, 그는 혼자 탑을 돌며 부처에게 빌고 또 빌었다. 이 탑이 처음 세워질 때의 염원처럼, 아홉 나라 오랑캐가 항복하고 신라의 평화가 굳건해지기를 갈망했다. 탑의 찰주본기를 읽으며 선덕여왕의 고뇌를 헤아렸고, 무너져가는 지방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등불아래 상소문을 읽으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는 결코 향락에 허우적거린 아둔한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총명했기에, 몰락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붙잡고 밤을 새우던 왕이었다.
서라벌의 권력을 움켜쥐고 화랑의 기틀을 닦았던 미실(美室)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나, 권력은 아직 그녀의 이름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왕가의 금서가 봉인된 서고 앞에서 마주했던 눈빛은 침묵만으로도 궁을 움직였고, 질서를 세웠다.
그녀가 화랑들을 거느리고 거리를 행진할 때마다 군중은 숨을 삼켰다. 진흥왕 시대의 화랑들은 분을 바르고 꽃을 꽂았으되, 전장에서는 망설임 없이 적의 목을 베었다. 미실에게 화랑은 신라의 아름다움과 법도 안에 있었다.
“전하, 신라의 왕은 영토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신라의 자부심을 몸으로 증명하는 자이옵니다. 피가 흐르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나, 그 피가 비겁함에 섞이는 것은 사직을 죽이는 일이옵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왕의 귓전을 때렸다. 그녀의 화랑들은 죽음 앞에서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미실이 심어준 미학적 자존심이었다. 죽음조차 신라의 이름 아래에서는 완성이어야 한다는 선민의식이었다.
왕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옆방에서 견훤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제 왕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랐다. 두려움과 수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시조 박혁거세의 형형한 눈빛과 미실의 서늘한 기개, 그리고 청년 화랑 위응의 절개가 있었다.
지금 견훤이 유린하고 있는 것은 왕비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라의 시원을 모독하고, 미실이 쌓아 올린 화랑의 골기를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황룡사 탑을 세우며 기원했던 수많은 기도까지 능멸하고 있었다.
왕은 깨달았다.
자신이 여기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그저 눈을 감고 이 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면, 신라의 천 년은 영원히 ‘겁탈당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을.
‘시조께서 알을 깨고 나오셨듯, 나 또한 이 치욕의 껍데기를 내 손으로 깨뜨려야 한다. 미실이 화랑들의 피로 사직을 지켰듯, 나 또한 나의 피로 이 더러워진 정전을 씻어내야 한다.’
깨달음이 번개처럼 왕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것은 망국의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권능이었다. 왕은 밧줄에 묶인 채로 허리를 곧게 폈다. 비록 옷은 찢기고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으나, 그 기운만큼은 청년 시절 풍월주의 기개보다 더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
왕은 견훤이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그가 자결을 종용하며 던져줄 단검은 죽음의 도구가 아니라, 시조의 빛으로 돌아가는 열쇠이자, 미실의 자부심을 완성하는 마지막 문장이며, 구층탑 아래서 고뇌했던 긴 밤들에 대한 마침표가 될 것이었다.
“오너라, 견훤. 네가 무엇을 짓밟든, 신라의 마지막 왕이 어떻게 죽는지, 그것만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서라벌의 하늘은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시조가 태어났던 나정의 숲처럼 고요했다. 그는 비로소 한 인간 박위응이 아닌, 천 년 신라의 주공으로서, 다가오는 최후의 운명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