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9화 - 다시, 포석정으로
치욕의 날이 밝았다. 11월의 차가운 새벽 서리는 서라벌의 지붕마다 하얗게 내려앉았으나, 도성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그 결백한 서리조차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간밤의 도륙과 약탈이 남긴 화마(火魔)는 아직도 월정교 너머의 민가들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무너진 담장 사이로 불길의 잔해가 핏빛 노을처럼 일렁였다.
견훤은 밤새 정전 마당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포승줄에 묶여있던 왕을 거칠게 깨웠다. 왕의 얼굴은 이마에서 흐른 피가 말라붙어 처참했으나, 홀로 여미었던 곤룡포의 붉은빛만은 그 수치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가자, 박위응! 네놈이 그토록 아끼던 포석정의 술이 말랐다기에, 오늘 내 특별히 네놈의 선혈로 그 골을 채워주마!”
견훤의 조롱 섞인 외침에 백제 병사들이 왕의 어깨를 걷어찼다. 왕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포승줄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왕은 비명 대신 깊은숨을 들이켰다. 정전을 나서는 왕의 눈앞에 펼쳐진 서라벌의 저잣거리는 아비규환의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성안 곳곳에는 간밤의 참상을 증언하듯 이름 모를 시신들이 거꾸러져 있었고, 승리에 취한 백제 병사들은 기고만장했다. 그들은 말 위에서 창대를 휘두르며 길가에 숨어 있던 백성들을 억지로 끌어냈고, 신라 왕실의 보물들을 전리품처럼 휘두르며 조롱했다.
그 길 위에서 왕이 마주한 것은 백성들의 처절한 원망이었다. 왕이 지날 때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적병의 칼날조차 잊은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절규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전하! 보시옵소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고귀한 나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잿더미가 된 집 앞에서 아이의 시신을 안은 사내가 왕을 향해 삿대질하며 울부짖었다.
“패권 다툼에 눈이 멀어 군사들을 제 사병처럼 부리고, 정적의 목을 치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그 조정 신료 놈들은 지금 다 어디에 숨었단 말이오! 그들이 백성의 고혈을 짤 때 백제군이 서라벌 코앞까지 오는 줄도 몰랐단 말이오!”
백성들의 원성은 화살보다 날카롭게 왕의 가슴에 꽂혔다. 권력의 중심에서 서로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편을 가르고, 무능함을 고결함으로 포장하며 국방을 소홀히 했던 신하들의 업보가 이제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로 치러지고 있었다. 왕은 그들의 욕설과 저주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지어야 할 천 년의 멍에였다.
행차가 황룡사 인근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 사찰의 종소리가 슬프게 울렸다. 성 안의 모든 관료가 도망쳤을 때, 오직 남은 것은 부처의 제자들이었다.
사찰의 금당 안,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노승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불상 밑에 엎드려 있었다. 법당의 문은 이미 적병들에 의해 박살이 났고, 백제군이 불상을 긁어대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나 스님들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염불만 외우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디 이 땅의 가련한 중생들을 굽어살피소서. 이 나라의 국운이 다하였으나, 백성들의 씨앗만은 남겨 주소서…….”
스님들의 기도는 나직하고 비장했다. 적병이 휘두른 칼에 승복이 붉게 물들면서도 그들은 불법(佛法)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왕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죽음을 앞둔 스님들의 기도는 왕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사직은 무너지나 정신은 남아야 한다는, 그 거룩한 명령을.
저잣거리의 원성과 사찰의 염불 소리가 서라벌의 새벽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왕은 이제 포석정으로 향하는 남산 숲길에 들어섰다. 적들은 침을 뱉고 나뭇가지를 던지며 "망국의 개"라고 놀려댔지만, 왕에게 그 길은 이제 치욕의 행로가 아니었다.
백성들의 원망은 왕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고, 스님들의 기도는 왕의 발걸음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왕의 눈에 비친 포석정의 입구는 이제 더 이상 유흥의 장소가 아니었다. 백성들의 분노와 승려들의 자비가 한데 어우러진, 신라라는 거대한 제단으로 통하는 성소(聖所)였다.
왕은 자신을 밀치는 병사의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포석정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엔 간밤의 서리가 아직 녹지 않은 채, 신라의 마지막 제물을 기다리듯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견훤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에서 내리는 순간, 왕은 비로소 깨달았다. 백성들의 울음과 스님들의 기도가 자신에게 부여한 마지막 임무는, 구걸하는 목숨이 아니라 고결한 종막이라는 사실을.
포석정의 마른 수로 위로 채 지지 못한 새벽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이제 천 년의 침묵을 깰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마지막 제10화가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