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 -10화 막회

#역사소설 제10화 (막회)- 다시, 포석정으로

by 김백

제10화 마지막 회 - 다시, 포석정으로



포석정(鮑石亭)의 새벽은 푸른 정막에 싸여 있었다. 물길 위로 간밤의 약탈이 남긴 오물과 나뭇잎이 흉물스럽게 엉켜 있었다. 굽굽이 수로마다 천 년 사직의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최후의 임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견훤은 군주만이 앉아 술잔을 받던 성소(聖所)에 거만하게 앉아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뽑았다.


챙그랑—.


왕의 발치에 던져진 단검은 차가운 소리를 냈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을 강요하는 쇳소리가 아니었다. 신라의 모든 역사를 여기서 도려내라는 승자의 잔인한 명령이자 조롱이었다. 주변을 에워싼 백제 병사들이 방패를 두드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자, 박위응! 네놈이 그토록 사랑하던 풍류가 이곳이더냐? 이제 네놈의 선혈로 이 수로를 채워 우리에게 마지막 술잔을 올리거라!"


견훤의 웃음소리가 남산의 숲을 흔들었다. 적들의 음탕한 웃음과 백성들의 피맺힌 절규들이 뒤섞여 포석정은 흡사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왕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칼날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동자 속에는 천년의 자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정의 숲에서 알을 깨고 나온 시조 박혁거세 그 태초의 빛과, 미실이 지키려던 화랑의 서슬 퍼런 골기, 그리고 백성들의 원망과 스님들의 비장한 염불 소리가 운명처럼 흐르고 있었다. 왕은 깨달았다. 지금 이 자리는 견훤에 의해 유린당하는 치욕의 현장이 아님을, 신라의 모든 오욕과 피눈물을 자신의 선혈로 씻어내고, 사직의 존엄을 영원히 봉인해야 하는 제단임을.


왕은 천천히 단검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칼날의 서늘함이 뜨겁게 다가왔다. 왕은 곤룡포의 앞자락을 풀었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여몄던 붉은 비단 자락이었다. 그리고 천 년의 고동이 멈춰가는 가슴 한복판을 겨누었다. 주변의 야유는 어느덧 사라지고,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견훤조차 왕의 눈에 서린,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성스러운 광휘에 압도된 듯 숨을 죽였다.


왕은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환영이 찰나의 불꽃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며 눈물 흘리던 여왕의 기도, 월정교 아래 흐르던 서라벌의 달빛, 그리고 자신을 지키다 스러져간 이름 없는 화랑들의 미소. 그들의 희망과 좌절, 아름다움과 추함이 모두 이 칼끝에 실려 있었다.


“이것은 패배자의 죽음이 아니요, 신라의 이름을 피로 씻어 영원히 남기는 최후의 예례(禮禮)로다.”


왕은 나직하게, 그러나 산하를 뒤흔들 듯 단호하게 읊조렸다. 그는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육신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자각의 불길 속에 재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단검을 자신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

뜨거운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쳐 붉은 곤룡포를 핏빛으로 적셨다. 순간 왕은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온 선혈은 포석정의 물길을 따라 흘렀다. 술잔 대신 왕의 피가 굽이쳤다. 왕은 피를 토하면서도 견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너져가는 의식 속에서 왕은 피 묻은 입술로 생애 가장 장엄한 선언을 완성했다.


“보아라…… 이것이 신라의 마지막 풍류이며…… 이제야 나는…… 비로소 왕이로소이다.”


그 목소리는 포석정의 숲을 흔들고, 무너져가는 서라벌의 성벽을 넘어 영겁의 시간을 관통했다. 견훤의 칼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그는 신라의 존엄을 영원한 시간 속에 봉인했다. 스스로 제물이 되어 오욕의 역사를 씻어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종말이었다.


왕의 신형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포석정의 가장 낮은 물길, 모든 물이 모여드는 그 끝자락이었다. 포석정의 물길은 이제 신라의 마지막 왕이 흘린 고귀한 선혈로 붉게 붉게 흐르고 있었다.


승리자 견훤은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패배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신라의 영토를 유린했으나, 신라의 왕 박위응의 자부심만은 결코 빼앗지 못했다.


포석정의 흐린 안갯속에서, 피로 젖은 곤룡포를 입은 왕의 주검은 마치 잠든 사자처럼 평온했다. 치욕은 씻겼고, 수치는 승화되었으며, 왕은 그렇게 신라 천 년의 가장 고결한 '왕'으로 완성되었다.


# 비로소 왕이로소이다 총 10화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