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왕이로소이다- 8화

#역사소설 8화 - 천년의 수의 (壽衣)

by 김백



제8화: 천 년의 수의(壽衣)


정전 앞마당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한 귀신들의 잔칫집으로 변해 있었다. 백제왕 견훤은 왕의 옥좌를 마당으로 끌어내어 비스듬히 앉은 채, 약탈한 신라 왕실의 금잔에 독주를 가득 부어 들이켰다. 그의 발치에는 어지러이 흩어진 신라의 제기(祭器)들이 뒹굴었고, 공들여 가꾼 정원의 기화요초들은 병사들의 군홧발 아래 뭉개져 진흙탕이 되었다.


"마셔라! 오늘 밤 서라벌의 달빛은 모두 우리 백제의 것이다!"


견훤의 포효에 답하듯 병사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밤하늘을 찔렀다. 병사들은 정전의 서까래를 뜯어 모닥불을 피웠고, 그 불길 위로 약탈한 가축들을 통째로 구워대며 기름진 냄새를 사방에 풍겼다. 그 비릿한 고기 굽는 냄새는 흘러나오는 피 냄새와 뒤섞여 기괴한 악취를 만들어냈다. 승리에 취한 자들은 예법도, 자비도 없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채 끌려온 신라의 관료들에게 억지로 술을 들이부으며 춤을 추라 핍박했고, 거부하는 자들은 상투를 잘라 조롱하며 낄낄거렸다.


마당 한구석에서는 약탈한 비단 꾸러미를 놓고 병사들끼리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다. 천 년을 버텨온 신라의 우아함은 그들의 웃음소리에 배설물처럼 버려졌다. 견훤은 그 난장판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옥좌의 용머리 장식을 대검으로 툭툭 쳤다. 그것은 한 나라의 존엄을 물리적으로 해체하는 야만의 손길이었다.


이 광기 어린 소란으로부터 단절된 내전의 깊은 어둠 속, 왕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부서진 목함(木函) 앞으로 다가갔다. 바깥의 소음이 벽을 넘어와 왕의 귀를 때렸으나, 오히려 그 소음은 왕을 지독한 적막 속에 고립시켰다. 곁을 지키던 상궁들과 내관들은 이미 도살당하거나 도망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평소 수십 명의 손길이 완성하던 군주의 복식이, 이제는 오직 왕 자신의 떨리는 두 손에 맡겨졌다. 왕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흰 속적삼을 주워 입었다. 왕은 흙먼지를 정성스럽게 털어내고 몸을 감쌌다. 이것은 천 년 사직의 시신을 덮을 수의(壽衣)의 첫 겹이었다.


왕은 청동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피투성이가 된 낯선 자신이 서 있었다. 마당에서 병사들의 음탕한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왕의 손가락은 부들거렸다. 그는 물그릇에 남은 찬물로 얼굴의 핏자국을 씻어냈다. 물속으로 번지는 붉은 피를 보며 그는 미실의 서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함속에서 붉은 곤룡포를 꺼냈다.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며 기원했던 국가의 안위와, 박혁거세의 그 순결한 빛이 서린 옷이었다. 왕은 한쪽 팔을 소매에 넣었다. 옷감의 서늘한 촉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입는 것이 비단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 그 자체임을 느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백제 만세!"라는 함성이 벽을 흔들 때, 곤룡포에 수놓아진 황금색 용의 눈이 왕을 응시했다. 그것은 비웃음인가, 아니면 마지막 연민인가.

왕은 허리띠를 조였다.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숨이 막힐 정도로 조여 오는 압박감은 사직에 대한 마지막 책임감이자, 동시에 도망칠 곳 없는 절망의 올가미였다. 밖에서는 견훤의 부하들이 승전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으나, 이 좁은 방 안에서 홀로 행해지는 의식은 뼛속까지 시린 슬픔만을 자아냈다. 왕은 자신의 손끝을 보았다. 곤룡포를 여미는 이 손이 신라의 마지막을 여미는 손이 되리라는 사실에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 옷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신라의 관(棺)이 될 것이다.”


왕은 나직이 읊조렸다. 목소리는 빈 방 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옷을 입고 나가는 곳은 신년의 연회장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술잔을 채워야 할 포석정의 차가운 돌길임을. 하지만 그는 흐트러짐 없이 대대를 고쳐 맸다. 손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으나, 그 눈에는 깊은 허망함이 고여 있었다. 천 년을 버텨온 나라가 단 하룻밤의 광기와 야만 속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군주의 고독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왕관을 머리에 얹었다. 구슬 하나하나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맑은 소리는 황룡사의 풍경 소리처럼 처연했고, 마당의 야만적인 소음들을 뚫고 들려오는 마지막 만가(挽歌)처럼 들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백제 병사들에게 유린당하던 연약한 인간 위응이 아니었다. 천 년의 시간을 수의로 입고, 스스로 제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고독한 제사장이자 최후의 증인이었다.


마당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왕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위로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신라에 대한 작별이었다.


“가자. 신라의 마지막 예법을 완성하러.”


그는 정갈하게 정돈된 소매를 휘날리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밖에서는 여전히 견훤과 병사들의 술주정과 여인들의 비명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으나, 수의를 갖춰 입은 왕의 발걸음은 허공을 걷는 듯 가벼웠다. 그 뒷모습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9화가 곧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