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환상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이데올로기(ideology) 이론 관련하여 마르크스(Marx)가 『자본』(Capital)에서 언급한 문장에 우선 주목한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행하고 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마르크스와 유사하게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으로 지배이념을 뜻한다. 전체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지배이념에서부터 크고 작은 정당들의 강령, 집단의 신조, 개인의 신념, 사회 규범 및 관습 등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공저인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관념론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비판한다. 비판의 대상은 헤겔학파(Hegelians)이다. 관념론으로서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당시 독일의 정신문화를 지배했던 기독교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시민들이 겪고 있었던 생활고를 정부가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신앙심을 빌어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이니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식으로. 마르크스는 여기에 저항하여 관념론적 해결이 아닌 실질적인 해결을 위해 유물론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파악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을 알 수 있다. 본 문제에 대한 마르스크의 입장은 긍정적이다.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 이외의 다른 이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구성요소라고 본다. 사회가 구성될 때 이데올로기가 요소로서 개입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의 본질이다. 본질을 제거하면 사회는 붕괴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분석된다 하더라고 그것은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입장이다. 피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좀 다르다. 그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좀 부당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른 체한다.
지젝은 질문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포스트-이데올로기 영역에 들어설 수 있는가?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없다. 그의 관점에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젝의 견해를 압축해서 나타내는 용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fantasy)이다.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두 경우에 적용된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건이 반복해서 발생했을 때 현실적으로 인식한다. 최초의 발생은 간과된다. “간과”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최초의 사건을 두 번째 사건과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젝을 이것을 환상 또는 오인(misrecognition)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첫 번째 사건을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논리는 인과관계를 전복한다. A가 원인이 되어 B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B가 발생했기 때문에 A가 소급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꿈에서 용을 보았다면, 내가 꿈을 꾸어서 용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용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정권 및 크고 작은 집단들의 지배이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지점 또한 환상이라고 불린다. 즉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체제의 이면에서 대중들을 조종하는 장치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장치가 체제의 전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그러한 사실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지젝이 말하는 환상의 또 다른 경우이다.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갈 이론이 있다. 그것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 이론(psychoanalysis)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헤겔 및 라캉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정신병 증상이 있는 환자들을 분석하는 데 적용된다면,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근간으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한다. 사회적 현상에는 정치적 이념을 비롯하여 문화 전반이 포함된다. 지젝이 사용하는 용어들 예를 들면, 환상, 실재(the real), 향유(enjoyment) 등은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가져왔다. 헤겔과의 연관성은 후반부에 헤겔의 의식 이론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제 라캉으로 눈을 돌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관련되는 부분에 한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 편: 영화,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의 존 내쉬(John Nash)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들여다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