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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미 May 23. 2022

내 인생의 가장 특별했던 "안녕?"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하늘은 무겁기만 한 12월. 남편 옷장을 열어 가장 따뜻해 보이는 패딩을 꺼내 입었다. 볼록 나온 배를 패딩으로 덮고 지퍼를 올렸다. 배를 덮을 수 있는 커다란 남편의 옷들이 가장 편한 만삭 임신부. 예정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아기를 기다리며 느릿느릿 길을 나섰다.  


    

 아직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안 된 건가. 아니면 내 뱃속이 너무 포근하고 좋은 걸까. 이러다 뱃속에서 너무 자라 버리면 출산이 힘들다고 하던데. 이리저리 떠다니는 생각들과 함께 집 앞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많이 걸어야 아기를 빨리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걷고 또 걸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출산의 과정을 생각하면 덜컥 겁부터 나서 출산일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란 날도 있었다. 그 바람이 이제 하루빨리 아기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조바심으로 바뀌다니.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보통이 아닌 아기인 것 같다.


     

 ‘망고야, 엄마가 많이 기다리고 있어. 어서 만나자.’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커다란 배가 꿀렁댄다.      

몇 바퀴 째 동그란 공원을 돌고 집으로 향했다. 무거운 배를 안고 많이 걸었던 탓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한참을 있었다. 누워서 바라본 거실 바닥은 게으른 나의 공간답지 않게 반짝반짝 윤이 났다. 쪼그려 앉아 걸레질을 하면 아기를 빨리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며칠 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걸레질을 했더니 이런 좋은 점도 있다.


      

 예정일이 하루, 이틀 지나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자라났다. 아기가 내려온다는 모든 활동을 열심히 했다. 많이 걷고, 쪼그려 앉아 걸레질도 하고, 짐볼 위에 앉아 수시로 동동 발을 구르기도 했다. 아기가 내려오는 요가도 했다. 분만예정일이 지난 임신부에게 좋다는 것들을 찾아 하나씩 해나갔다. 시키는 대로 잘하는 순응형 인간, 정답대로 하는 모범생답게 군소리 않고 척척 해냈다. 하지만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때부터 시작이었나 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을 의문 없이 수용하고 착실하게 순응해 온 엄마, 그리고 세상과는 무관하게 자기만의 속도대로 타박타박 나아가는 아이. 이토록 다른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불안감을 내려놓고 편안히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릴 수 있었을까. 그때의 나는 정답이 있는 좁은 세상에 살고 있었기에 늦어지거나 다르다는 것을 편안히 바라볼 수 없었다. 아기가 쉬고 있는 방에 다가가 이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 끊임없이 노크를 하는 조급하고 불안한 엄마였다.     




 소파에 모로 누워 임신부를 위한 팟캐스트를 틀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나와 라마즈 호흡법을 알려줬다. 몇 달 전부터 틈 날 때마다 연습해보던 호흡법을 익숙하게 따라 했다. 분만할 때 진통을 줄여주고 출산 진행을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니 열심히 연습했다. 출산할 때 잘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출산 예정일로부터 나흘째 되던 날 밤, 짐볼에 앉아 몸을 위아래로 동동거리며 남편과 <나 혼자 산다>를 보던 날이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일어서는데 몸에서 주르르륵 물이 흘러내렸다. 양수가 터졌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는 반가움과 앞으로 펼쳐질 진통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늦은 밤 텅 빈 도로를 달리는 차에 기대어 긴장한 채 병원에 도착했다. 굴욕적이라던 몇 가지 처치를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끝내고 아기를 기다렸다. 진통, 고통, 고난, 위기, 시련, 고초. 수많은 말을 섞어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그 순간이 장대하게 느껴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한꺼번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누워있는 내 품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수없이 상상했던 순간이지만 익숙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낯선 벅참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눈물이 흘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고르고 고른 첫마디를 아기에게 건넸다.


 “안녕?”


 엄마가 된 내가 낯설었지만 첫인사를 건넨 그 순간만큼은 무엇도 섞이지 않은 짙은 환희만이 가슴에 가득했다.      

 12월 24일. 세상은 축복과 사랑으로 넘실거렸고, 분만실은 따뜻한 온기와 벅찬 미소,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천사를 선물 받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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