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해외 생활을 하고 싶다는 환상과 로망에 빠져 해외 취업을 결정하고, 멋모르고(정말 뭘 몰랐다) 상하이로 날라가 일을 한 세월이 7년, 그리고 독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살아간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섹스앤더시티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을 상상하며 시작했던 해외 직장 생활은 진짜 미드에나 나올 법한 재밌는 순간도 많았지만, 외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를 해야 하는 순간도 많았다.
‘해외에서 일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좋아!’ 라는 생각으로 스웨덴 회사에서 주니어로 일을 할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회사가 좋고 직장 동료들이 좋아서 한국에서 자주 써먹었던 '아프다는 핑계로 회사 안 가기' 수법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반짝반짝했던 해외 생활이 2-3년 정도 흐르니 슬슬 새로움이 일상이 되어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용서가 되는 '주니어'가 아니었다. 주어진 업무를 단순히 해내는 것에서 넘어 '잘' 해내야 했고, 나 역시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아마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마케팅 천재, 마케팅 고수, 억대연봉을 받으며 스카우트되는 커리어우먼(이제 보니 그 놈의 드라마가 문제다)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더 나은 커리어를 쌓는 것' 에만 인생의 가치를 두고, 일을 했지만 결과는 내가 원했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
'꿈의 직장'이라고 여겨질 만큼 배울 것 많은 멋진 외국인 사장님 밑에서, 사장님의 총애를 듬뿍 받아가며 일을 했지만, 그런 사장님께 보답하고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그만큼을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나에게 완벽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아직 내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처럼 완벽한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그 결과치가 나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마케팅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았던 때이기도 하다.
남들이 봤을 때 좀 더 있어 보이는 커리어가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던 당시의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다. 세일즈의 오르내림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오르내렸고(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을 챙길 여유도 없어 함께 일하는 사람을 닥달만 하고(사장님은 나에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참 못났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함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그렇게 우울해 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일을 통해 알게 된 언니가 있었다. 그때 언니는 한국 대기업의 마케팅&PR 분야에서 높은 직책으로 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머리도 식힐 겸 중국어를 배운다며 상하이로 막 온 상태였다.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 멋진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커리어를 다 내려놓고 갑자기 중국에 와서 어학원 학생의 신분으로 중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이기도 했고 신기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한국에서 대단한 커리어를 갖고 있던 언니니 나에게 일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언니를 붙들고 하소연 + 고민상담을 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한참을 차분히 듣던 언니가 나에게 툭 던진 말이 아직도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Sue 정말 열심히 사는 구나. 근데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지마."
네..??
"그렇게 한 목표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지쳐. 그리고 몸도 마음도 다 다쳐. 세상에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거든. 그냥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 하고 인정하고 좀 힘을 빼고 사는 게 인생건강에 좋아."
그때 언니의 조언을 잘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도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더 나은 커리어를 만들어 보겠다며 이직도 해보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왔다.
바로 'burn out'이 된 것이다.
(*burn out: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마치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 – 출처, 다음백과 ‘번아웃 증후군’)
우울증에 걸린 사람 마냥(정말 우울증에 걸린 것이었을 수도 있다) 사소한 것에도 기분이 한없이 다운되었고, 인생이 즐겁지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도시였던 상하이가 미웠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해외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 괜히 해외에 나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했던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이 화려하고 빠르게 변하는 상하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면서 깨달았다.
그때 그렇게 목매달며 이루고 싶어했던/이루어냈던 커리어 목표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별 것 아니었음을.
인생에는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것(사람과의 관계, 가족, 건강)이 있음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는 것은 좋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열정을 가지고 목표에 도전하는 것이 더 이상 내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내가 너무 힘들어 견딜 수 없다면 살짝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학창시절 때는 수능이 더 나은 인생을 살게 해 줄 유일한 길인 줄 알았지만,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다니면서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것' 아니어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인생의 길은 많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힘을 빼고 사는 것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0년 수능 때는 성적비관으로 자살을 하는 청소년들이 없기를 바래보며,
나 역시 훗날 돌이켜 보면 별 것 아닐 일에 지금 너무 목 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