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였던 길 위에서

by 꿈담은나현


장례식이 끝나고 흩어진 검은 구두들이 골목을 비워냈다. 국화와 향냄새가 뒤섞인 바람이 코끝을 스쳤고, 하얀 리본이 달린 화환이 트럭에 실려 멀어졌다. 나는 느슨한 넥타이를 손끝으로 쓸며, 우리가 수없이 오르내리던 그 입구 앞에서 멈췄다. 낡은 간판과 벗겨진 페인트, 기름 냄새가 스민 분식집 창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바닥의 금이 난 아스팔트 틈에는 오래된 기억처럼 빗물이 고여 있었다.


“야.”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바람이 골목을 훑고 지나가며 전깃줄이 미세하게 떨렸다. 떨림의 끝에서, 오래전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낮게 깨어났다. 그 순간, 여름이 겹쳐 왔다.


시간이 한 겹 접히며 뜨거운 콘크리트 냄새와 수박의 단 향, 웃음이 섞인 공기가 되살아났다. 옥탑의 계단은 늘 뜨거웠고, 햇살을 머금은 벽은 발끝에서 숨을 토했다. 문을 열자, 도시의 지붕들이 바다처럼 펼쳐졌고, 평상 위엔 반으로 쪼갠 수박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씨앗을 손끝으로 튕기며 웃었다. “우리, 이 길 끝까지 가자.” 그 말이 바람에 섞여 별빛처럼 흩어졌다.


한입 베어 문 수박의 단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의 웃음은 여름의 불빛처럼 맑고 투명했다. 우리는 그때 세상이 젖은 종이 같다고 믿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의 이름이 그 위에 또렷하게 찍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던 여름이 있었다.


하지만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명이 하얗게 내려앉던 발표장에서 그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쓴 문장을 그의 입으로 들었지만, 그 문장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 흘러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함께 걷던 길 위에서 그는 이미 나를 두고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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