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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롱이 Dec 09. 2022

갑자기 여의사가 제주도로 간 까닭은?

나는 분홍이다

마흔이 되었다.

하늘은 붉고 해운대 바다는 푸르다.


나는 차가운 모래 위에 웅크려 앉아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당겼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지평선 바다를 건너온 공기에 밀려 나부꼈고, 소금바람은 평소보다 짠내가 심해 코를 통해 심장까지 채우는 냄새가 났다. 불혹(不惑)이 된 내 몸은 이름값을 못하고 파도처럼 흔들린다


나는 한참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다, 잡히는 대로 모래를 손에 움켜쥐었다 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모래가 이슬비처럼 흘러내린다. 곧 내 손은 흙먼지만 남기고 텅 비어버렸다,


마치 내 몸과 마음처럼.....


치마를 털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바라보니, 바다 위에 있는 조각상(잠제등표)이 보인다.


- 누가 저런 걸 설치했을까


난 저 조각상이 싫었다. 혼자 고고한 척 하지만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방울과 물거품을 받아내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의사라는 내 직업이 만들어내는 표상 속에 깃든 피로와 고독을 연상케 한다


저 조각상은 나같이, 노을 진 그림자 같이, 굳어있고,

바람과 파도에 지쳐있을 터다


바닷가 해변에서 바라보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추켜올린 저 팔은 우아해 보이지만,

사실 조각상은 해변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하는 몸짓일 것이다


뭐가 문제일까

난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왜 주사 처방을 안 하냐고 따지던 보호자가 문제일까?

왜 주사 처방을 하냐고 따지던 보호자가 문제일까?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인가?


하나의 생각이 산책 나가자는 강아지처럼 들러붙더니, 한 마리씩 더 튀어나와 결국 양손에 백 여덟 마리 강아지를 산책시키듯, 힘겹게 난 끌려가고 있다.


- 떠나야겠어


무엇에서 떠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이놈의 코로나


대한민국을 벗어나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도 없단다.

안 되겠다. 좀 더 현실적인 도피처를 생각해보자


도?


그래 맞아. 없는 휴가라도 짜내서 가볼까

한 3박 4일 정도?

아니야. 너무 적어 지금 내 마음의 허기는 그 정도로 작지 않다고. 그럼 4박 5일? 아니야 그것도 적어. 숫자는 복리이자처럼 불어나더니 드디어 타협점을 찾았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조촐히 생각하자.

365박 366일로



막상 떠나려 하자 또다시 걱정이 꼬리를 문다.

집은? 차는? 부모님은? 돈은? 내 남자는? 의사 평판은? 갔다 와서는? 고독은? 밥은? 옷은? 친구는? 그리고.. 내 독서모임 해운대 독서살롱은?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지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창살이 맞몰린듯 딱딱한 검은색 테두리가 있는 종이를 출력했다.

평생 처음 접해보는 양식에서 오는 까끌까끌한 낯섦이 나를 다시 두렵게 했다. 이 공포 또한 나를 묶고 있는 속박 이렀다! 난 칼을 들듯 펜을 세워 내 이름을 썼다.


사직서 : 분홍이(실제로는 내 본명을 썼다)


다음 날 아침,

파도처럼 핑크 포인트가 들어가 있는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말리는 직원과 아쉬워하는 동료가 있었지만, 우리 같은 40대 선수들은 알지 않나


낙장불입(落張不入)



누군가는 말하겠지. 넌 의사라서 좋겠다.

그렇게 막 갈 수도 있고.

첨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난 지금처럼 살면서 일탈을 해 본 적이 없다.

세상과 부모님이 내준 숙제만 충실히 풀며 살았다구. 그래서 오히려 이런 탈선이 힘들 수도 있는 것이다. 땡땡이도 한번 쳐본 놈(^^)이 잘 친다고 하지 않는가


풋사랑에도 쉬운 이별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힘든 것은 힘든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많은 것이 갖춰진 이곳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저곳으로 간다.

내가 가진 것은 헤르만 헤세의 각오뿐.


그런데 진짜 나는 왜 가는 걸까?


...

머리에도 쩜(.) 쩜(.) 쩜(.)

모르겠다.

지금 당장 몰라도 괜찮

어찌 되었든 돌아올 때쯤은 알 수 있을 테다.

우리 인생사 정확한 이유를 알고 살아갔던 게 몇 가지 있으리오.


40살 선물로

1년 제주살이를 하러 떠난다.

대신 돌아올 때는 제주의 향기와 나의 변화 그리고 작은 깨달음을 그대들에게 나눠주겠다


Adiós



From 2022년 1월의 분홍으로부터



에피소드 : 분홍(제주도편)

1편 : 갑자기 여의사가 제주도로 간 까닭은?(현재)

2편 : 태연은 제주도 푸른 밤을 부르며 아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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