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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롱이 Jan 02. 2023

새해, 아름답게 살고 싶다

추억

지나간 것은 말이 없다. 어릴 적 뛰놀던 사과나무 그림자도, 발가벗고 뛰어들었던 그 계곡물도,

 동그란 흙 이불을 덮고 누워계시는 아버지도 더 이상 말이 없으시다. 하지만 이 적막 속에서 난 더 많은 소리들을 듣곤 한다. 이런 종류의 소리들을 때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음파들이 긴 끈이 되어 흔들리며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매 순간들은 흩어지지만 아름답게 살아나가야 한다.


새해가 밝았다. 모든 이들은 바다와 산과 혹은 그보다 좁지만 평온한 담요 속에서 오늘의 태양을 맞고 있다. 하지만 나 같이 주말에도 일하는 자는 건물 밖 태양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들을 회상하며 조금 더 집중해서 마음에 닿았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소리는 지금은 나와 다른 황톳빛 아래층으로 이사 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께서 같은 층, 같은 대지를 밟고 있었던 지난 시간의 소리다.


내게는 그 소리의 거센 바람은 대게 단양에서 불어온다. 단양은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쪽에는 소백산의 준령들이 즐비하고 충주호로 흘러드는 남한강이 심한 곡류를 이루어 험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저 아름다운 옛 소리를 들려주는 추억의 고향이다


지금은 명칭이 바뀌었지만 내가 국민학교 시절, 새해 전날이 되면 우리 가족은 죽령고개를 넘어  큰집으로  낡은 황금색 르망을 타고 갔다. 가는 길은 어린 나에게는 가혹하게도 길게 굽이치고 있었지만 좁은 비포장 길을 따라 큰집의 앞마당에 내리면 모든 게 잊혔다.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조차 사과향기를 머금은 것 같은 곳이다. 큰 집 앞에는 아무도 없는 정상에서 개울물이 내려오고, 때 되면 올망졸망 검은 열매를 맺는 오디나무가 크게 팔 벌려 인사하고, 두세 마리의 개들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컹컹 거리며 먼 들판에서 달려왔다.


다음날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일어나셔서 말없이 채비를 하셨다. 그러면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으레 해야 하는 일처럼 우리를 씻게 하시고 두꺼운 옷을 단단히도 입히셨다. 온 가족이 모여 깜깜나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께서는 윗부분이 약간 휘어진 지팡이를 짚고서 뒷산 꼭대기로 잘도 우리를 이끄셨다.


난 그렇게 산정상에 올라 어머니가 싸 오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고 놀고 있으니, 먼산 꼭대기 밑에서 처음 솟아오르는 돋을볕이 보였다. 곧 이 햇살은 사방으로 펼쳐지며 고운 귤색 물감으로 선을 그어가듯 세상을 물들였다. 그러면 제일 앞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소원을 빌라고 하신다.

난 그러면 어머니께 쪼르르 달려가 손을 잡고 가족의 건강을 빌고 "야호오"라고 큰소리를 외쳤다.

이렇게 소원을 빌고 나면 왠지 저 태양은 내 소원을 싣고 천천히 하늘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큰 배달통만 같이 느껴졌다. 덕분인지 나는 건강히 매해를 잘 보냈다.


지금 그 날의 마음속 기도와 내 외침의 소리는  태양과 함께 사라졌다. 지금 나의 말들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없는 이 땅의 대지에도 해는 떠오를 것이고, 난 하나의 소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음률이기를 바란다.



오늘 일이 끝나면 늦게라도, 한 해 소원을 적어 조카와 함께 바다라도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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