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에서 H로 가는 길
대학교 다니며 들었던 강의 중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내용 중에 하나가 태권도 시범의 변화 과정을 표현한 영어 단어이다. 존경하는 박교수님은 W에서 H로의 변화라 하셨다.
개념은 이렇다. 년도의 맨 앞자리가 바뀌기도 전에 태권도 시범은 주로 기술 중심이었다. 여기서 기술 중심이 갖는 의미는 시범을 보는 대중을 다른 시범 요소 무엇보다 고려하여, 시범 세트 구성에 있어서 태권도 격파 기술이 무엇인지, 보기 쉽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데 있다.
그래서 당시의 시범 세트를 보면, 도약 기술이나 회전 기술의 1단계 격파부터 시작하여 한 번 도약으로 격파해나가는 수를 늘려가는 방식의 세트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같은 격파를 여러 사람이 도미노로 줄지어 차례대로 차는 방식이 큰 임팩트를 가졌다.
위와 같이 세트를 구성하여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시범을 보는 대중이 태권도 시범을 처음 볼지라도 다음 사람이 차는 격파가 무엇인지 예상을 할 수 있게 도왔고, 만약 예상치 못했을지라도 그 변화가 처음 보는 사람의 사고 내에서 어떻게 차는지 이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격파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영화 타짜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태권도 시범에 있어서 발은 눈보다 빠르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번의 도약으로 이루어지는 다단계 격파는 보통 3개에서 많게는 7-8개 까지도 찬다. 간혹 태권도 한마당 개인 종합 격파에서는 격파 규정에 따라서 개인당 격파할 수 있는 송판의 개수가 7-10개이기에 한 번의 도약 격파로 대회 격파 세트를 구성하는 참가자들도 간혹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참가자가 보기에도 순간적으로 어떻게 발이 표현되었는지 놓치는 순간도 있다. 물론 격파 세트를 잡는 보조자가 잡는 방향을 보고서 격파자가 어떤 조합으로 발을 찰 것인지 예상이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감을 잡고 보기는 하지만, 대중은 태권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감이 없다. 즉, 격파의 진행 방향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격파하는 장면을 보고 있을지라도 송판이 깨졌다는 결론만 이해가 가능하지 어떻게 격파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해가 빠지게 된다.
처음에 한두 번 정도야 '우와, 어떻게 찬 거지' 신기한 감정이 들 수는 있지만, 시범을 보는 동안 발을 어떻게 찼는지 이해는 전혀 하지 못하고 사람이 점프했더니 또는 회전했더니 송판이 깨져있었다가 감상의 전부라면 그 시범이 과연 보는 입장에서 집중이 가능할까.
여기서 핵심으로 등장한 것이 교수님의 'W', 즉 'What/무엇'이다. 시범 세트를 구성하는 데 있어 대중에게 어떤 격파를 보여줄 것인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시범자가 준비한 최고의 화려한 기술들로만 구성해서는 발이 눈보다 빠르기에, 관람자는 시범자와 함께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함께 하지 못한다. 바꿔 말해 보는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안 하느니 못하고,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말 못 할 노력이 담겨있으나, 관중과 시범자의 소통이 안 되는 시범이 된다.
그렇기에 과거 관람하는 입장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집중하는 시범이었다면, 그 '무엇'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어떻게', 즉 How에 그다음 시범 구성의 발전이 있다.
전에는 상대적으로 태권도에 대해 실제적으로 아는 인구가 적었고 시범단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대중에게 태권도의 존재를 알리는 노력이 다른 요소보다 앞섰다. 이는 세계무대에서도 동일했다. 그런데 이제는 태권도(겨루기)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었고 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품새가 정식종목이 될 정도로 많은 세계인이 함께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다. (겨루기가 태권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시범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겨루기나 품새에 비해 먼 것은 사실이다.)
즉, 태권도를 알리는데 주목했던 과거의 모습에서 이제는 전보다 더 깊이 있게 또 다양하게 태권도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대중의 눈도 전과 비교할 때 높아졌다. 동시에 간단한 앞차기 격파 하나에도 보여줄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대중의 인지가 쉬워지고, 기술이 화려해진 만큼 태권도 시범에 대한 이해의 진입장벽이 전과 비교할 때 더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전보다 시범단의 숫자는 굉장히 늘어나고 시간이 흘러 숙련도가 쌓이는 배경 속에서 태권도 기술은 어느 정도 평준화를 이루어간다. 격파할 수 있는 시범 세트가 크게 다루지 않는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물론, 소위 세상이 말하는 태권도 천재가 있어서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발을 표현하고 남들이 차지 못했던 신기술들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시범단이 같은 카드를 갖고 있다면 타 시범단과 차별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 그래서 각 시범단은 스스로의 컬러를 갖기 위해서 같은 카드도 다르게 표현하는 'How/어떻게'에 집중하며 태권도 시범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또한 시범 구성원에 따라서 보여줄 수 있는 카드가 달라지고, '어떻게' 대중에게 표현할 것인지에 따라서 그 시범단의 시범에 대한 평가는 하늘과 땅으로 확연히 나뉘게 된다. 이는 그 기술을 얼마나 잘 차는지 못 차는지에 절대성을 갖기보다 때로는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따라서 못 차는 사람이 잘 차는 사람보다 대중에게 뚜렷한 인식을 남겨줄 수 있는 상대성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태권도 시범의 발전은 다시 W로 돌아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러나 위의 W는 'Why/왜'이다. 결론부터 말해보면 왜(Why) 그 기술(What)이 그 타이밍에 그렇게(How) 구성되어야 하는지 중요해지지 않을까 짚어보자는 말이다. 이것이 결국 무엇(What)을 위한 것이냐로 표현된다면 다시 W로 돌아가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여기서 물론, How나 Why와는 상관없이 태권도의 기술, 그(What) 자체만을 매끄럽고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시범의 형태도 계속 존재할 것이고 존재해야만 한다. 쉽게 말하면 위와 같은 보수적 시범의 가치를 지키는 한편, 세상의 진화와 함께 좋은 가치를 담아내는 진보적 시범도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한쪽만을 고수한다면 태권도는 뿌리를 잃거나 흐르지 못한 고인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보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대입해보고자 한다. 내가 대학에서 W에서 H로의 변화를 들을 때, 강연 무대에서 How to에서 What, Why에 대해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다.
취업 시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강연은 어떻게 살건인지(How-to)에서 무엇을 위하여(What), 왜 살 것인지(Why)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How-to 세상에서 중요한 가치인) 스펙보다 더 중요한 사회가 왔다고 설명한다.
[말장난 한번 해보자면, 스펙이라는 여러 카드 즉 What에서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How로 사회가 변화했다고 해볼 수도 있다.]
인문학과 관련 없어 보이는 유통회사가 취업 인터뷰를 볼 때, 스펙보다 인문학적 소양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밝힌다. 왜냐하면 부회장이 생각하는 인문학의 시작은 "사람의 겉만 보는 것이 아닌 마음을 읽으려는 관심과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권도 시범으로 돌아와서 관람자의 입장에서 시범 세트를 구성했던 시범의 변화가 이 사회적 변화와 전혀 연관이 없을까.
태권도 시범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 How에 집중하면서 처음엔 그저 음악의 분위기만을 사용하던 초창기에서, 음악과 태권도 동작이 함께하게 되었고, 이제는 스토리를 담고 있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태권도 시범이 사용되기도 한다.
몇 년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네임밸류가 있던 선배들이 주를 이루던 팀이었다. 무주 웰빙 대회의 시범 경연 참가작품 중에 해당 팀의 세트 구성이나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 찼는지에 대한 기억보다 이 작품이 담고 있던 메시지가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아있다. 기합을 넣는 자세는 취하였지만 자체 무음 처리한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라스트 격파가 되고 A탑 위의 보조자의 손에서는 현수막이 내려왔다. 우리의 짧은 경험은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시범을 간접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문학적 소양이 담겨있는 태권도 시범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아무리 기술적 완성도 높은 시범 세트 구성일지라도 관중의 입장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이 기술과 저 기술이 같아 보이는 반복적으로 인식되는 시범은, 시범단의 노력의 비해 얻는 결실에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쉽게 표현하면 기술적 완성도는 비교적 부족할지라도 시범자와 관중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시범이 대중의 평가에 있어서는 위의 시범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않겠는가. 마치 할리우드의 엄청난 투자비로 만들어졌지만 평가는 그렇지 못한 영화와 독립영화로 만들어졌어도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의 차이라 생각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