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감수성과 안전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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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왜 더 대담해지지 않고 더 조심스러워지는가]
자유가 많아지면
사람은 더 과감해질 것 같습니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더 다양한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고,
더 자기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예전보다 훨씬 덜 갇힌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선택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더 대담해지기보다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취준생은
기회가 많아질수록
더 자유롭게 지원하기보다
더 안전한 카드부터 계산하게 됩니다.
직장인은
가능성이 많아질수록
더 과감하게 움직이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는 쪽을 먼저 따집니다.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길이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선택 앞에 서면
가장 덜 위험해 보이는 방향부터 고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선택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함께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부터 봐야 합니다.
심리학자 Barry Schwartz의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은
선택이 늘어나는 것이 항상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결정 이후의 만족감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선택은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비교와 책임, 후회의 가능성도 함께 늘립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사람들은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더 자유롭다고 느끼기보다
더 부담스럽다고 느끼는지 이해가 쉬워집니다.
길이 많다는 것은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틀릴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를 포기해야 하고,
그 포기가 나중에 손실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함께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유가 커질수록
선택 자체를 더 가볍게 다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신중해지고,
더 망설이고,
더 안전한 쪽을 찾게 됩니다.
특히 지금처럼
취업도, 이직도, 커리어도
한 번의 선택이 꽤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시대에는
그 경향이 더 강해집니다.
여기에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작동하는 또 하나의 심리가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자 William Samuelson과 Richard Zeckhauser의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은
사람이 여러 대안이 있을 때
더 좋은 선택이 있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기존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변화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손실을 더 크게 느끼기 쉽다는 뜻입니다.
이 이론은
왜 직장인이 이직을 고민하면서도 오래 망설이는지,
왜 취준생이 새로운 시도를 생각하면서도
결국 익숙한 방식의 준비로 되돌아오는지,
왜 사람들은 더 나은 가능성을 알면서도
쉽게 현재를 놓지 못하는지 설명해줍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자리는 이미 알고 있는 자리이고,
새로운 선택은 아직 모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불만을 견디면서도
새로운 불확실성 앞에서는 더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머뭇거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건 용기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손실을 계산하는 방식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는
감정의 차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의사결정이론가 David E. Bell의
후회이론(Regret Theory)은
사람이 선택을 할 때
단순히 결과의 이득과 손실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후회의 감정까지 예상하며 결정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사람은 미래의 손실뿐 아니라
미래의 후회까지 미리 두려워하며
현재의 선택을 더 조심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많은 사람들이
조금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견디면서도
새로운 선택 앞에서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취준생은
도전적인 선택을 했다가 실패하면
“차라리 더 안전하게 준비할걸” 하고 후회할까 봐 두렵습니다.
직장인은
이직했다가 기대만큼 나아지지 않으면
“그냥 남아 있을걸” 하고 후회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직 준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기회를 찾고 싶지만
잘못 움직였다가
지금보다 더 나쁜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은
항상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덜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덜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이
대개는 더 익숙하고, 더 승인된, 더 안전한 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더 독특해지기보다
오히려 더 보수적이 되기도 합니다.
선택은 많지만,
잘못 고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많지만,
그 길의 결과를 전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유 속에서 모험을 배우기보다
자유 속에서 손실을 피하는 법부터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비슷한 선택으로 돌아오는지도 조금 보입니다.
안전한 회사,
읽히는 경력,
설명 가능한 성과,
익숙한 경로.
그것들은 모두
평범해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큰 시대에
후회를 덜 남길 것 같아서 선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슷함은
상상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큰 시대를 건너기 위한
합리적인 방어로 생겨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조심스러움을
쉽게 소심함이나 우유부단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손실과 후회를 함께 관리하려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왜 자유로울수록 더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의지의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선택이 많을수록
사람은 더 자유로워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책임을 떠안습니다.
그리고 책임이 커질수록
모험보다 안전이,
독특함보다 승인된 경로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막상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서로를 더 많이 닮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선택이
자유보다 안전 쪽으로 기울고,
개인의 노력은 점점 더 구조 속에서 조정된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경쟁을
정말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요.
노력은 분명 개인이 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둘러싼 규칙과 문턱, 비교와 기준은
과연 누가 만들고 있는 걸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노력은 개인의 것이지만 경쟁은 구조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개인이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계속 자기 책임만 늘려왔기 때문에 더 깊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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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 D. E. (1982). Regret in decision making under uncertainty. Operations Research, 30(5), 961–981.
Samuelson, W., & Zeckhauser, R. (1988). Status quo bias in decision making. Journal of Risk and Uncertainty, 1, 7–59.
Schwartz, B. (2004). The paradox of choice: Why more is less. Ec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