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위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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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뛰는 것은 분명 나인데, 왜 게임의 규칙은 늘 내 바깥에서 정해지는 것처럼 느껴질까]
사람들은 늘 노력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취준생에게도
노력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직장인에게도
결국 실력과 성실함이 남는다고 말하고,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결국 준비한 만큼 기회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움직여야 하고,
버텨야 하고,
배워야 하고,
자기를 증명해야 합니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래 살다 보면
조금 이상한 감각이 생깁니다.
분명 내가 뛰고 있는데,
내가 애쓰고 있는데,
정작 게임의 규칙은
내가 정한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는 같은 노력을 해도 더 빨리 읽히고,
누구는 같은 말을 해도 더 신뢰받고,
누구는 같은 성과를 내도 더 매끄럽게 통과합니다.
이럴 때 사람은
쉽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합니다.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하거나,
전부 세상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대개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노력은 분명 개인의 것입니다.
하지만 경쟁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사람의 행동과 사회의 규칙이
어떻게 함께 움직이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사회학자 Anthony Giddens의
구조화 이론(Structuration Theory)은
사람이 구조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조와 무관하게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규칙과 자원, 제도와 관행 속에서 행동하지만,
동시에 그 행동을 통해 구조를 다시 반복하고 유지하기도 합니다.
즉, 구조는 사람을 제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가능하게도 만들고,
사람의 행동은 구조에 단순히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계속 살아 있게도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노력은 개인의 것이지만 경쟁은
구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조금 선명해집니다.
취준생은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씁니다.
면접도 스스로 준비합니다.
포트폴리오도 스스로 만듭니다.
직장인도
보고서를 쓰고,
회의를 하고,
성과를 만들고,
자기를 업데이트하는 일을 스스로 합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도
경력을 정리하고,
시장을 살피고,
자기의 강점을 다시 구성하는 일을 직접 합니다.
즉, 노력은 언제나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행동은
공중에 떠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형식의 자기소개가 읽히는지,
어떤 성과가 더 가치 있게 평가되는지,
어떤 경력의 흐름이 더 설득력 있는지,
어떤 말투와 태도가 더 유능해 보이는지는
이미 구조 안에서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은 그 구조를 몰라도
그 구조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떤 노력은
같은 양을 들여도 더 빨리 인정받고,
어떤 노력은
훨씬 더 오래 설명해야 겨우 읽히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경쟁은 단순한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이 벌어지는 공간 자체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회학자 Pierre Bourdieu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사회가 하나의 단일한 공간이 아니라,
각기 다른 규칙과 자본, 위계가 작동하는
여러 장(field)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각 장 안에서는
무엇이 가치 있는 자원인지,
누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어떤 감각과 말투가 더 자연스럽게 통하는지가 다르게 정해질 수 있습니다.
이걸 취업시장과 조직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더 쉽습니다.
취업시장이라는 장 안에서는
어떤 경험은 더 빛나고,
어떤 서사는 더 설득력 있고,
어떤 대학, 자격, 인턴 경험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신뢰를 받습니다.
조직이라는 장 안에서도
모든 노력이 똑같이 읽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은
전략적으로 들리고,
어떤 사람의 말은
비슷한 내용을 말해도
그저 성실한 정도로만 읽힙니다.
어떤 사람의 실수는
성장 과정으로 해석되고,
어떤 사람의 실수는
능력 부족으로 해석됩니다.
즉, 사람은 같은 운동장을 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기울기가 다른 장 안에서 경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람이 게을러서 지는 것도 아니고,
구조가 전부를 결정해서 사람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노력이 항상 중립적인 공간에서 평가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는 이미 그 장의 언어를 알고 들어오고,
누구는 그 장의 분위기를 몸에 익힌 채 시작하고,
누구는 무엇이 가치 있는지 오래전부터 배운 채 움직입니다.
그래서 경쟁은
언제나 현재의 노력만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이런 구조 속에서도
더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어떤 사람은
늘 한 번 더 번역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사회학자 Pierre Bourdieu와
Jean-Claude Passeron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Social Reproduction Theory)은
학교와 제도, 문화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이미 더 유리한 배경과 문화적 자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친화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흔히
경쟁을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된 일처럼 느끼지만,
많은 경쟁은 이미 누적된 자원의 차이 위에서 벌어집니다.
말을 정리하는 방식,
자기를 설명하는 감각,
어떤 자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태도,
무엇이 중요한지 미리 알아채는 습관.
이런 것들은
단순히 개인의 재능이 아니라
살아온 환경과 누적된 경험,
이미 익숙해진 문화적 감각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경쟁이 도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경쟁에 들어가기 전부터 번역의 노동이 하나 더 붙습니다.
이쯤 되면
“노력은 개인의 것이지만 경쟁은 구조의 것이다”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이 말은
노력이 소용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노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 노력이
어떤 규칙 안에서 읽히는지,
어떤 장 안에서 가치가 되는지,
누구에게 더 자연스럽게 허용되는지까지 함께 봐야
비로소 경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피로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력 말고도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억울함은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같은 게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같은 출발선이 아니었다는 감각에서 생깁니다.
그리고 그래서
사람은 자꾸 묻게 됩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뛰고 있는 이 장의 규칙 자체를 먼저 읽어야 하는 걸까.
아마 둘 다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경쟁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해석하는 순간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 뛰고 있지만,
그 뛰는 방식과 속도,
읽히는 말과 가치의 기준은
언제나 구조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노력은 개인의 것이지만
경쟁은 구조의 것이라는 말은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한 현실 인식에 가깝습니다.
내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구조가 어떤 규칙으로 움직이는지 봐야
어디서 더 애써야 하고
어디서 다른 전략이 필요한지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구조 안에서 경쟁하고 있는데도
사람을 더 깊게 흔드는 것은
언제나 실패만일까요.
어쩌면 정말 사람을 오래 무너뜨리는 것은
실패 그 자체보다
애쓴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애쓴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감각은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버티기 힘든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력이 어떤 식으로든 보상되고 있다는 확신을
점점 갖기 어려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15
Bourdieu, P. (1984). Distinction: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 (R. Nice, Trans.). Harvard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79)
Bourdieu, P., & Passeron, J.-C. (1990). Reproduction in education, society and culture (2nd ed.). Sage. (Original work published 1977)
Giddens, A. (1984). The constitution of society: Outline of the theory of structur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