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실패보다 더 사람을 흔드는 것은 애매한 정체다.

실패보다 모호함

by NOAH KIM

[먼저 보기 : 14. 애쓴 만큼 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과 회의감]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15


[끝난 실패보다, 끝나지 않은 애매함이 사람을 더 오래 지치게 한다]


사람은

실패만으로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실패는 아픕니다.


붙지 못한 결과,

원하던 자리를 놓친 경험,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한 순간은

분명 사람을 흔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더 오래 붙잡는 것은

항상 분명한 실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애매한 상태일 때가 많습니다.


취준생에게는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시간이 그렇습니다.


직장인에게는

잘하고 있는지도, 그렇지 않은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가 그렇습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떠날 것도 아니고 남을 것도 아닌 채

계속 마음만 걸쳐 놓고 버티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분명 끝난 실패는

아프지만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애매함은 다릅니다.


끝이 나지 않습니다.


계속 마음을 붙잡고,

계속 의미를 보류하게 만들고,

계속 에너지를 갉아먹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을 때 겪는 부담부터 봐야 합니다.


조직심리학자 Daniel Katz와 Robert L. Kahn의

역할모호성(role ambiguity) 개념

사람이 자기 역할에서

무엇이 기대되는지,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을 때

긴장과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일이 많아서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내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충분한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훨씬 더 쉽게 지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은

취업과 직장, 이직의 장면에서 아주 익숙하게 나타납니다.


취준생은

어디까지 준비해야 충분한지 모를 때 지칩니다.


직장인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의미 있는 성과로 읽히고 있는지 모를 때 지칩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은

지금 버티는 것이 맞는지,

지금 옮기는 것이 맞는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을 때 가장 많이 흔들립니다.


사람은 바쁠 때보다

애매할 때 더 많이 소모됩니다.


할 일이 많으면

힘들어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할과 방향이 흐려지면

움직여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매한 상태는

단순히 답답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에너지를 동시에 마모시킵니다.


그런데 애매함이 힘든 이유는

기대가 불분명해서만이 아닙니다.


그 상태 자체가

어딘가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느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Robert E. Park의

주변인(marginal man) 개념

사람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놓여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할 때

특유의 긴장과 불안정, 이질감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원래는 문화와 사회 집단 사이에 놓인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지만,

오늘의 직장인과 취준생, 이직 준비자에게도 꽤 익숙하게 읽힙니다.


취준생은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상태에 오래 머물 때

자기 위치를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직장인은

조직 안에 있지만

정말 이 안에서 계속 갈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

애매한 경계 위에 놓인 것처럼 느낍니다.


이직 준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몸은 아직 현재 조직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단순히 선택을 미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세계를 떠나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태,

즉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상태에 놓입니다.


이 상태는

생각보다 오래 사람을 흔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전히 안에 있거나 완전히 밖에 있을 때보다

중간에 걸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매한 정체는

결과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내가 지금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흐려진 상태라는 점에서 더 피로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봐야 합니다.


애매한 상태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어떤 통과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문화인류학자 Victor Turner의

리미널리티(liminality) 개념

사람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이전의 정체성은 끝났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설명합니다.


리미널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예전처럼 안정적이지도 않고,

새로운 위치에 정착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안정과 혼란을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오늘의 커리어와 삶의 전환기에도 아주 잘 맞습니다.


취준생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거의 끝내고

직업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넘어가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습니다.


직장인도

하나의 역할을 끝내고

다른 역할로 옮겨가려는 순간,

혹은 조직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바뀌려는 순간

오랫동안 리미널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직 준비자는 더 분명합니다.

이미 현재를 끝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새로운 자리를 아직 얻지 못했을 때

그는 가장 전형적인 과도기 상태에 놓입니다.


문제는

이 과도기가 짧으면 변화의 일부로 견딜 수 있지만,

길어지면 사람을 서서히 지치게 한다는 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애매함은

희망보다 불안을,

전환보다 소모를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실패보다 애매한 정체를 더 오래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실패는

아프지만 분명합니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시 시작할 지점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매함은

끝도 시작도 흐리게 만듭니다.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놓아야 하는지,

더 기다려야 하는지,

지금 움직여야 하는지

계속 판단을 보류하게 만듭니다.


이 보류가 길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소모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분명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더 많이 지칩니다.


겉으로 보면

아직 버티고 있고,

아직 길 위에 있고,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이미

정체성과 에너지가 오래 마모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애매한 상태에서 지친 사람에게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왜 벌써 힘드냐”라고 말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실패해서 지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경계 위에서

자기를 붙들고 있어야 해서 지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지금의 취업시장, 조직, 커리어는

사람을 분명한 승리나 분명한 탈락으로만 밀어 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애매한 중간 상태에 오래 머물게 합니다.


준비 중인 사람,

검토 중인 사람,

유예된 사람,

보류된 사람,

결정하지 못한 사람.


그 상태가 길어질수록

사람은 실패보다 더 깊은 피로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상태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야 하는가,

그 애매함을 견디는 동안

내가 얼마나 자주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가도

삶의 피로를 크게 바꿉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명확한 안정 대신

오래 지속되는 애매함 속에서 버티고 있다면,

왜 모두가 원하는 안정은

언제나 이렇게 희소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왜 안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한데,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안정은 모두가 원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불안을 견디기 힘든 이유는

안정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안정이 점점 더 희소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음글 보기 : 16. 모두가 원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 안정]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17


[참고문헌]


Kahn, R. L., Wolfe, D. M., Quinn, R. P., Snoek, J. D., & Rosenthal, R. A. (1964). Organizational stress: Studies in role conflict and ambiguity. Wiley.


Park, R. E. (1928). Human migration and the marginal ma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33(6), 881–893.


Turner, V. (1969).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 Ald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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