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 뒤의 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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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피로]
기술은
분명 일을 쉽게 만듭니다.
예전보다 더 빨리 찾을 수 있고,
더 빨리 정리할 수 있고,
더 적은 시간으로 초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AI도 그렇고,
각종 자동화 도구도 그렇고,
우리가 손에 쥔 많은 기술은
분명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비용은 줄어든 것 같은데
사람은 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예전보다 덜 힘들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자주 지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피곤해지는 이유가
단지 일이 많아서만은 아니라는 점부터 봐야 합니다.
조직심리학자 Robert A. Karasek의
직무요구-통제모형(Job Demand-Control Model)은
일의 요구가 높아질수록 부담은 커지고,
그 요구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재량이 낮을수록
사람은 더 큰 긴장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바쁜 일 자체만이 아니라
높은 요구 앞에서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효율이 좋아져도 사람이 더 편해지지 않는지 이해가 쉽습니다.
기술은 어떤 과업의 시간을 줄여줍니다.
하지만 그만큼 요구도 함께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주 반대입니다.
더 빨리 할 수 있게 되면
더 빨리 해야 한다는 기대가 생기고,
더 많이 처리할 수 있게 되면
더 많이 맡을 수 있다는 전제가 생깁니다.
즉, 기술은
과업의 비용을 낮추지만
동시에 직무요구의 기준도 함께 올릴 수 있습니다.
취준생은
자기소개서 초안을 더 빨리 만들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것처럼 느낍니다.
직장인은
보고서 초안을 더 빨리 만들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수정과 더 높은 완성도를 요구받는다고 느낍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도
자료를 더 쉽게 모을 수 있게 되면
이제는 더 꾸준히, 더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처럼 느낍니다.
즉, 줄어든 비용이
곧바로 줄어든 요구로 이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쉬워진 도구” 속에서도
여전히 더 높은 압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높아진 요구만이 아닙니다.
회복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때
피로는 더 깊어집니다.
작업심리학자 Theo F. Meijman과 Gijsbertus Mulder의
노력-회복모형(Effort-Recovery Model)은
일에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을 쓰면
그에 따른 부담 반응이 생기고,
그 부담은 충분한 회복이 뒤따를 때에야
원래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많이 일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을 마친 뒤 내가 정말 회복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회복이 충분하지 않으면
부담은 하루의 끝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음 날로 이어집니다.
이 이론은
왜 요즘의 피로가 “일이 많다”는
말로만 설명되지 않는지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일에서 잠깐 벗어나 있어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는 상태가 길어질 때
사람은 더 쉽게 지칩니다.
취준생은
하루를 쉬는 것 같아도
문득 자소서 생각이 들어오고,
갑자기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남들은 얼마나 준비했는지 다시 검색합니다.
직장인은
퇴근했어도
메신저 알림 하나에 다시 일 모드로 돌아가고,
주말에도 다음 주 보고와 회의가 머릿속에 남습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도
현재의 일을 하면서
계속 이력서를 손보고,
공고를 읽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즉, 문제는
노동의 양뿐 아니라
회복의 부재입니다.
기술이 속도를 올려주면
과업은 더 잘게 쪼개지고,
짧은 틈에도 일이 들어올 수 있고,
사람은 쉬는 시간에도
완전히 일이 끝난 상태에 도달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효율은 높아졌는데
피로도는 줄지 않는 역설이 생깁니다.
사람이 덜 노력해서가 아니라,
노력 뒤에 회복할 시간이
점점 더 얇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가 길어지면
피로는 단순한 피곤함을 넘어
더 구조적인 소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조직심리학자 Evangelia Demerouti, Arnold B. Bakker,
Friedhelm Nachreiner, Wilmar B. Schaufeli의
직무요구-자원모형(Job Demands-Resources Model)은
일의 조건을 크게 직무요구와 직무자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직무요구는 지속적인 노력과 비용을 요구하는 측면이고,
직무자원은 목표 달성을 돕고 요구의 부담을 줄여주는 측면입니다.
이 모형은 특히 요구가 높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을 때
사람이 점점 더 소진 쪽으로 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같은 바쁨도 어떤 사람에게는 견딜 만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너질 만큼 무거운지가 보입니다.
핵심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통제감을 느끼는지,
회복의 시간이 있는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원이 있는지,
내 노력이 목표와 연결되고 있다고 느끼는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문제는
기술이 들어올수록
요구는 더 빨리 올라가는데
자원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도구는 좋아졌지만
재량은 늘지 않고,
연결은 쉬워졌지만
회복은 얇아지고,
속도는 빨라졌지만
도움을 받을 시간과 구조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편해진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더 촘촘하게 소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피로는
이상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도구는 좋아졌습니다.
분명 예전보다 많은 것을 빨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더 바쁘고,
회복은 더 얇고,
지침은 더 쉽게 누적됩니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할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기대가 빨라졌고,
그 기대를 버틸 자원과 회복은
그만큼 빠르게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수록 왜 더 지치는가라는 질문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자연스럽습니다.
효율은
늘 해방으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때로 효율은
더 높은 요구,
더 얇은 회복,
더 빠른 소진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직장인과 취준생, 이직 준비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지쳐갑니다.
처음에는
도구가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도구가 가능하게 만든 기준을
내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기술과 기준은 계속 바뀌는데
조직은 왜 늘 새로운 말로 비슷한 경쟁을 반복하는 걸까요.
왜 어떤 시대에는 혁신이라 부르고,
어떤 시대에는 민첩성이라 부르고,
어떤 시대에는 AI 전환이라 부르지만
정작 안에서 느끼는 압박은 자꾸 닮아갈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조직은 왜 늘 새로운 언어로 같은 경쟁을 반복하는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치는 이유는
변화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변화의 이름만 바뀐 채
비슷한 요구가 계속 다른 얼굴로 돌아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22
Demerouti, E., Bakker, A. B., Nachreiner, F., & Schaufeli, W. B. (2001). The job demands-resources model of burnout.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86(3), 499–512.
Karasek, R. A., Jr. (1979). Job demands, job decision latitude, and mental strain: Implications for job redesign.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24(2), 285–308.
Meijman, T. F., & Mulder, G. (1998). Psychological aspects of workload. In P. J. D. Drenth, H. Thierry, & C. J. de Wolff (Eds.), Handbook of work and organizational psychology: Vol. 2. Work psychology (2nd ed., pp. 5–33). Psycholog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