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직은 왜 새로운 언어로 같은 경쟁을 반복하나?

혁신과 새로운 규칙, 그러나 익숙한 압박

by NOAH KIM


[먼저 보기 : 20. 효율적으로 일을 하게 될수록 왜 더 지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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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바뀌는데 압박은 왜 자꾸 익숙한 얼굴로 돌아오는 걸까?]


조직은 늘 새로운 말을 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혁신을 말하고,

어떤 시기에는

유연성을 말하고,

어떤 시기에는

민첩성을 말합니다.


요즘은

디지털 전환,

AI 전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같은 말이 더 자주 들립니다.


말만 들으면

항상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해야 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쟁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조직 안에서 오래 버틴 사람일수록

묘한 데자뷔를 느낍니다.


말은 분명 새롭습니다.


하지만 안에서 느끼는 압박은

이상할 만큼 익숙합니다.


결국 더 빨리 적응해야 하고,

더 많이 증명해야 하고,

더 잘 정리해서 보여줘야 하고,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조직에서 말은 단지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을 먼저 봐야 합니다.


조직커뮤니케이션학자 David Grant, Cynthia Hardy,

Cliff Oswick, Linda L. Putnam의

조직담론(Organizational Discourse)

조직 안에서 쓰이는 언어와 이야기, 개념과 수사가

이미 있는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합리적이며

어떤 행동이 정당한지를 만들어내는 데도 관여한다고 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조직의 언어가 그렇게 중요한지 조금 선명해집니다.


혁신이라는 말이 나오면

사람은 단지 새 프로젝트가 생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전 방식대로 일하면 안 될 것 같고,

더 창의적이어야 할 것 같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첩성이라는 말이 나오면

단지 절차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배우고,

빨리 움직이고,

빨리 바꾸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은 압박이 함께 들어옵니다.


AI 전환이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건 단지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더 빨리 읽고,

더 빨리 쓰고,

더 빨리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까지 함께 들어옵니다.


즉, 조직의 말은

그 자체로 사람의 행동을 밀어붙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이 바뀌면

사람이 느끼는 압박의 결도 바뀌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주 비슷한 요구가 반복됩니다.


더 빨리 적응하라.

더 잘 증명하라.

더 많이 보여주라.

더 적은 시간 안에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라.


표현은 새로워도

경쟁의 구조는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면을 더 또렷하게 설명해 주는 이론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직이론가 Eric Abrahamson의

경영 유행 이론(Management Fashion)

조직에서 유행하는 관리 개념과 기법이

항상 순수하게 효율이 좋아서만 퍼지는 것은 아니며,

새로움과 합리성, 진보성을 상징하는 믿음과 함께 확산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을 가져오면

왜 조직은 늘 새로운 말을 반복적으로 꺼내는지 이해가 쉬워집니다.


새로운 언어는

변화를 보여주기에 좋습니다.

조직이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신호가 되기 좋고,

리더가 시대를 읽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좋고,

구성원에게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긴장을 주기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은

실제로 유용해서 퍼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의 현대성과 진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혁신도,

민첩성도,

디지털 전환도,

AI 전환도

이런 상징의 기능을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이 구성원 개인에게 들어올 때입니다.


조직에게는 새로운 비전일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늘 또 다른 숙제가 됩니다.


새로운 말이 나올 때마다

사람은 또 배워야 하고,

또 증명해야 하고,

또 자기 자신을 그 언어에 맞춰 다시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직은

새로운 말을 할수록 새로워 보이지만,

사람은 그 말을 따라갈수록

비슷한 피로를 반복하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조직의 언어를 수동적으로만 듣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조직심리학자 Karl E. Weick의

의미부여(Sensemaking)

사람이 모호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해석하고 의미를 붙이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이해하려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관점은

왜 같은 조직 언어가 사람마다 다른 피로로 들어오는지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혁신이라는 말을 듣고

기회라고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생존 경쟁이라고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민첩성이라는 말을

더 자유로운 일 방식으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쉬지 말고 계속 바뀌라는 요구로 받아들입니다.


즉, 조직의 언어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 갖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언어를

자기 위치와 경험, 불안과 기대 속에서

다시 해석합니다.


문제는

그 해석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새로운 언어의 표면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익숙한 압박을 더 빨리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직장인은

“변화”라는 말속에서

곧 다가올 평가를 먼저 읽고,

취준생은

“미래 역량”이라는 말속에서

또 하나 추가된 준비 과제를 먼저 읽습니다.


이직 준비자는

“새로운 기회”라는 말속에서도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또 얼마나 자신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부터

새로운 언어는

희망보다 피로를 먼저 불러오기도 합니다.


조직이 늘 새로운 언어를 꺼내는 이유는

정말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항상 사람을 더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

사람은 그 언어를 따라가며

비슷한 경쟁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새로워도

그 언어가 조직 안에서 요구하는 것은

결국 더 나은 적응,

더 빠른 증명,

더 높은 기준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익숙한 피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냉소적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조직은 실제로 변하고 있고,

새로운 언어 가운데는

실제로 더 나은 방향을 여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이 새롭다고 해서

그 안의 경쟁까지 완전히 새롭다고 믿어버리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조직은 자주

새로운 언어로

오래된 긴장을 다시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언어를

자기 삶의 문제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피로해집니다.


그러니

조직은 왜 늘 새로운 언어로 같은 경쟁을 반복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지 유행어를 비웃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지금 내가 느끼는 압박이

정말 새로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붙인 익숙한 경쟁인지

구분하기 위한 질문에 더 가깝습니다.


그 구분이 선명해져야

무엇을 진짜 배워야 하고,

무엇을 적당히 흘려보내야 하며,

어떤 말은 믿고 어떤 말은 경계해야 하는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언어와 도구, 기준이 계속 바뀌는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이 유리한 걸까요?


아니면

그 모든 변화 속에서

무엇이 진짜 문턱이고 무엇이 그냥 소음인지를 먼저 읽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앞서가는 걸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보다 문턱을 먼저 읽는 사람이 앞서간다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언어를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그 언어 뒤에서 실제로 무엇이 평가되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감각인지도 모릅니다.


[다음글 보기 : 22. 정답보다, 문턱을 먼저 읽는 사람이 앞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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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Abrahamson, E. (1996). Management fashion.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21(1), 254–285.


Grant, D., Hardy, C., Oswick, C., & Putnam, L. L. (Eds.). (2004). The SAGE handbook of organizational discourse. SAGE Publications.


Weick, K. E. (1995). Sensemaking in organizations. SAGE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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