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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Jul 12. 2022

5년 지기 친구, 블랑

<크로넨버그 블랑 1664>

맥주를 좋아한다. 내게 있어 이 말은 술을 좋아한다는 말보다 앞에 있다. 물론 술이라는 개념 안에 맥주가 있는 것이지만, 맥주를 좋아하게 되면서 술자리가 아닌 술 자체가 좋아진 나에게는 이 선후관계가 더 알맞다. 탄산음료를 좋아하지도 않고, 마시고 죽자의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는데, 어쩌다 이렇게 주정뱅이가 되었을까? 아니 이게 뭐라고 그렇게 매번 좋아하게 됐을까?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니까, 같은 말로 갈무리해도 괜찮겠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더 면밀히 알고 싶고, 더 깊게 표현하고 싶은 사랑도 있다. 무언가 하나를 진득이 좋아하지 못하는 나에게 맥주는 꽤나 오래된 취미이자, 삶 전반에 물든 취향과도 같다. 반짝 일었던 관심의 물꼬를 붙잡고 5년째 함께하는 경험은 생각보다 진귀하다. 그래서 맥주를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게 되고, 맥주에 관해서라면 무어라도 자꾸 기록을 남기고 싶어진다. 


스무 살에 도착하고 한창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이 재밌고 궁금하기만 할 때, 수시로 생기는 과 행사나 동아리의 술자리는 그 반가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채울 수 있는 꽤 효율적인 자리였다. 신입생이라 선배들에 비해 돈도 얼마 내지 않았고, 얻어먹는 일도 잦았어서 가벼운 지갑에 큰 부담도 없었다. 10시라는 잔혹한(?) 통금시간을 울며 겨자 먹기로 지키면서도, 한창 재밌어질 시간에 지하철 역사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틈틈이 술자리를 즐겼다. 이유는 몰라도(아마 얼른 취하고 싶고, 가격적인 부담도 덜하니까?) 다들 소주만 시켜댈 때라, 다 같이 짠을 하지 않는 이상 혼자 홀짝일 일은 없었다. 자리가 맛깔났을 뿐, 소주는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혼자 맨 정신으로 있자니 그건 또 심심해서 적당히 잔을 기울여가며 놀았다. 선배들이 아이스크림 먹자며 데리고 나갈 때가 제일 좋았던 걸 보면 확실히 술을 좋아해서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생맥주 한 잔 더 사주는 게 좋아요, 아이스크림은 집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제가 사 먹을게요 ~~~! 그렇게 이십 대 초반 시절 나에게 있어 술은 그저 자리를 위한 매개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자연스레 마시다가, 학기가 끝나면 도통 마실 일이 없었다. 미디어에서 만나는 '감성'으로는 포차에서 마시는 소주보다 놀이터에서 마시는 캔맥주가 좋았지만, 좁은 캔 입구로 나오는 탄산이 영 배불러 한 캔을 다 비운 적이 드물다. (지금은 왜 그렇게 한 캔도 다 못 마시고 배가 불렀는지 알고 있지. 잔에 따라 마시지 않았으니까!) 


이태원 펍에서 처음 '크로넨버그 블랑 1664'를 마시고 맥주에 관한 인상이 바뀌었다. 맥주에서 이런 맛도 날 수가 있구나? 괜스레 희고 작은 꽃이 떠오르는 달큰하고 산뜻한 맛이 향긋하게 혀를 훑고 지나갔다. 당시만 해도 세계맥주라며(?) 크루저나 KGB, 머드 셰이크를 팔던 때였기 때문에, 인공적인 단맛을 즐기지 않는 내게는 블랑의 은근하고 자연스러운 향이 꽤 매력적이었다. 투명한 파란 병도 너무 예뻤고. 이런 맛이라면 종종 찾게될 것 같았다. 

출처 : 인스타그램 @k1m.k1ya


그때부터 블랑이 보이면 조금씩 사 마시기 시작했다. 생맥주로 블랑을 판다는 곳이 생겼다는 말에 큰 기대를 안고 찾았던 상수 부근의 어느 술집도 생각이 난다. 캔맥주보다는 병맥주, 병맥주보다는 생맥주가 맛있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던 나에게는 크게 기대에 못 미치던 맛이었지만, 그렇게 조금씩 맥주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블랑 생맥주는 유독 맛있기가 어려운 것 같다. 잘못 마시면 괜히 미지근하고 비릿한 느낌. 왜지?) 더 결정적으로 맥주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지만, 그건 다음 글에 적어보기로. 


지금도 블랑은 편의점 네 캔 만원(그런데 이제는 만천 원이 된)을 고를 때 단골처럼 끼워 넣는 술이다. 향긋한 꽃향이라 느꼈던 맛은 고수 씨앗과 오렌지 껍질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벨기에식 밀맥주에서 자주 사용하는 조합인데, 시트러스한 것들과 만나기만 하면 한껏 상쾌해지는 고수의 몫이 아주 톡톡하다. 비슷한 것들로는 블루문, 호가든 등이 있다. (다른 소리인데, 한동안 수입 문제로 블루문이 편의점에 사라졌던 기간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고 다시 들어온 블루문이 꽤 신선해서 그런지, 레시피가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맛있어졌다. 오렌지와 고수의 캐릭터가 선명하고 깨끗해서, 잘 만들어진 술을 마시고 있다는 감각이 꽤 기분 좋다. 일전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블루문이 편의점에서 보이면 한 번 도전해보기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블랑은 유독 컨디션을 타는 맥주다. 캔입의 과정의 문제인지 내 기분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정말 정말 맛있을 때가 있고, 괜히 입에 찝찝하게 남을 때가 있다. 전자의 맛이 늘 일정하면야 정말 좋겠지만, 그 맛있을 때의 희열이 너무도 좋아서 자주 도전하게 된다. 뒤늦게 나온 크로넨버그 1664 라거도 청량한 캔 빛깔 때문인지 다른 라거들 보다 괜히 더 산뜻한 기분으로 마시게 된달까. 추억은 종종 맛보다 진하기도 하니까요. 결론은 블랑, 제가 좀 우정한다구요! 왜 애정 아닌 우정이냐, 물으신다면 세상에 맛있는 맥주가 참 많고, 그중 아직 못 마셔본 맥주도 되게 많아서요. 제 애정도 한정된 자원이거든요. 아직 그걸 쏟을 곳이 너무도 많이 남았어요. (그래서 좋아요!) 그러니 블랑, 그대는 저와 우정으로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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