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택시였다. 일행과 같이 탔던 택시에서 먼저 내린 일행이 자동결제를 해둔 지 모르고 카드결제를 했다가 이중 납부가 되어버렸고, 기기 사용이 능숙치 않았는지 기사님은 내역이 안뜬다는 이유로 결제 취소를 해주지 않았다. 택시회사와 티머니 회사에 전화를 반복하며 해결 요청을 했으나 결과는 여지껏 묵묵부답. 그렇게 할만큼 했는데도 며칠 째 해결된 것 없이 신경만 쓰고 있다보니 점점 스트레스가 쌓였다. 불편을 겪은 것은 내쪽인데 내역 문제든 뭐든 그 기기를 사용하고 더 잘 아는 기사님과 회사 측이 해결해야하는 문제 아닌가, 그런데 해결은 커녕 왜 자꾸 내게 일을 미루지? 강성고객이 되어야만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주던 곳들의 기억과 함께 막연함과 답답함이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한데 몰려왔다. 별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그 별 게 아닌 문제로 며칠 째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지금은 자동결제를 했던 일행에게 이중결제 확인이 가능한 지를 알아봐달라 부탁해둔 상태이지만, 어젯밤까지도 '내가 왜 일행한테까지 피해를 주어야 하지. 내일 전화해서 다시 이야기 해봐야겠다. ' 하며 우습지만 녹음기를 켜고 예행연습까지 했었다. 그렇게 녹음을 한 후에야 조금의 후련함과 함께 일행 쪽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선은 기다려 보자, 는 마음이 찾아와 나쁜 기분을 수그러뜨리고 잠에 들 수 있었다.
덤벙대는 성격 탓에 무얼하든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실수를 먼저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카페에서 음료를 받아 자리로 갈 때 마침 계단이 있다면, 그 계단에서 꼭 구르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3년 가까이 일하던 빵집에서 매일 빵을 썰면서도 매번 손가락을 깊이 베이는 상상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상상 자체는 그리 유쾌하지 못하지만, 그 덕에 예방할 수 있는 사고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라 믿는다. 익숙하다 느껴 풀어지는 순간 넘어지고 다치는 몸가짐의 소유자로서는 이러한 버릇이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한 어떤 덕목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뚫는 치명적인 단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했을 때의 자신을 다독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넉넉히 건네는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이 나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도착한다. 그래서 이번 택시사건(?) 같이 작은 문제도 내 실수가 겹쳐 시작된 일이면 해결되기 전까지 머릿 속에서 잘 떨쳐내지를 못한다.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라디오 녹음을 했다. 거즘 반 년만이다. 일전에 쓰던 맥북이 망가진 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일 년 남짓이 흘렀고, 촬영과 편집 장비가 오롯이 휴대전화만으로 줄면서 맥주 리뷰 채널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꽉 찼다. 그러다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저축으로 조금씩 돈이 모였고, 최근에 중고로 새 맥북을 구매했다. 다시 글쓰기 좋은, 그리고 음성 위주의 콘텐츠를 만들기 좋은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하다가 불현듯 생방송처럼 라디오 녹음을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골(?)팔로워 분들께 제안을 했다. 그렇게 흔쾌함과 신남으로 시작된 방송은 한 시간 반 가까이를 그득 채웠다. 시기가 시기이다보니 연말결산스러운 대화들이 많이 오갔다. '올해 시리즈로 이야기 나눠보아요. 올해의 책/영화, 올해의 음식, 올해의 음악, 올해 가장 잘 한 일 등으로요' , '저는 올해 퇴사한 거요.' , '와 - 정말 큰 결정 하셨어요.' , '저는 올해의 음식 버섯 전골로 할래요. 비건식을 시작하면서 가장 다채롭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예요.' , '닿아님 보고 저 지금 맥주 깠어요. ' 등의 여러 말들을 듣고, 또 나눴다. 누군가 가만히 이 광경을 멀찍이 바라본다 생각하니 어느 아기자기한 동네의 가게를 빌려 하는 포트락 파티 같겠구나, 싶었다. 라디오, 라는 말로 묶을 수 있던 사람들. 그들 덕에 나는 한 다발의 이야기 꽃무리를 여매는 꽃집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방송 중에 최근에 발견한 필름사진 계정이 아주 좋아서 한참을 둘러봤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일어는 히라가나만 겨우 몇 자 알아서, 일본 분이라는 것 말고 다른 정보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연인과 친구들을 찍고 올리는 계정인데, 그냥 그게 너무 즐겁고 아름다워보여서 사진을 처음부터 죽 훑었다. 그들의 순간 속에 내가 잠시 들어갔다 나온 기분. 사실 오래 가는 사진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진을 찍는 이유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찍은 사진, 그러니 순간을 위한 사진. 모델 일을 하면서 일상에서 카메라를 꺼내드는 일이 확연히 줄었던 나에게는 사진을 위한 순간만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정작 '올해의 시리즈'에 관해 가장 답을 적게 한 것도 내 쪽이었다. 정해둔 방송시간을 가늠하며 다른 화제들로 넘어가기 위함도 있었지만, 정말 딱-하고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올해가 그렇게 심심하게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기억이 흐릴까 생각하니 역시나 기록해둔 것이 몇 없던 것이다. 피사체로 자주 사진과 영상에 담기고, 맥주 리뷰를 위한 영상을 찍고, 애인과 공유하는 작은 노트에 편지를 적고, 한 달의 달력을 채우고 스케줄을 정리하는 것은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뭐랄까, 정말 그 순간과 감정을 위한 기록은 거의 한 적이 없다. 일기를 안 쓴 지부터가 꽤 오래된 것이다. 글을 쓰자, 해도 이것을 엮어 무엇을 만들 생각부터 했다. (콘텐츠에 미친 인간..) 주제를 미리 정하고 쓴 글에는 하루를 넣기가 어려웠다.
나를 위한 글을 써야 남에게 보일 글감도 자꾸자꾸 생겨난다는 것을 일상에 치여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절을 꽤 오래 끌고 갔었는데. 너무 먼 훗날의 일처럼 뒤로 밀려난 것을 알았다. 택시로 시작한 잠 못 드는 새벽과 연말 라디오 녹음이 끌고 간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그렇게 새해결심 같은 말이 남았다. 글을 좀 써야지. 뭐라도 매일 키보드 앞에 앉아야지. 하루쯤이야, 대신 뭐라도 하루하루 써야지.
그리고 글을 마치기 전에 일행에게 무사히 환불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 ) 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