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준비 : 11월의 단상

by 김닿아

0. 제목부터 적은 글은 간만이다. 애초에 글을 쓰려고 자리를 잡고 앉은 것부터가 오랜만이기도 하다. 출근 전날이라 늦지 않게 침대에 누워야 하지만, 오랜만에 다녀온 낮술 약속 이후로 어쩐지 속이 쓰려서 볶은 옥수수 열몇 알로 차를 연거푸 끓여마시던 중이었고, 밤요가를 마친 후 새롭게 차를 한 잔 더 끓인 참이었다. 늦게까지 무언가를 붙잡고 있기엔 요 며칠 쌓인 피로로 눈꺼풀이 무겁지만, 그만큼 내뱉지 못하고 쌓인 단어와 문장 역시 묵직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외국어로 듣고 말하는 데 쓰면서 모르는 건 시시 때때 익혀둬야 유리한 상황 속에 놓이고 난 후로는, 생각과 감정을 언어화하는 데 시간이 배로 걸린다. 마음이 말이 되어 입밖을 나가는 일이 말이 되지 못한 채 쌓이는 속도에 현저히 뒤처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진득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배설에 가까운 욕구가 목까지 차오르다가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하고 싶은 건지를 생각하다 보면 쉽게 피로해졌다. 무작정 허기를 채우다 더부룩해진 속처럼 말을 쏟아내고 나면 뭉근한 후회로 괴로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가서 달리거나 일로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책을 펼쳤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오늘은 일단 흰 창을 띄웠다. 뭐라도 적고 그것을 내 눈으로 가장 먼저 읽어내는 순간이 필요했다. 제대로 이어지는 글을 완성할 자신은 없어서 독립서점에 있을 법한 얇은 단상집의 형식을 빌린다.


1. 교토의 겨울을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제법 추울 것 같다. 여름이 워낙 덥고 습한 지역이라 집이며 건물이 바람이 잘 통하는 구조로 지어진 곳들이 많아 겨울에는 웃풍이 제 안방인 양 드나드는 것이다. 여행으로 1월의 교토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바닥이 차가워질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11월부터 시작될 줄은 몰랐다. 손과 발이 찬 데 비해 스스로 손발이 시리다, 는 감각을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그게 다 방바닥의 온기 덕분이었던 걸까,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서른 번 가까이 겨울을 겪었는데도, 밤에 자려고 누울 때면 코끝이 시린 건가? 하고 코를 만져보는 감각까지 낯설게 다가왔다. 에어컨의 히터 기능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목이며 피부가 건조해지는 게 싫어서 선택지에 넣지 않았다. 대신 피부에 닿는 것들을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기로 했다. 수면잠옷은 좋아하지만 수면양말은 한겨울에도 좀처럼 신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두꺼운 실내용 양말에 폭신한 실내화까지 챙겨 신고 있다. 다이소에서 200엔짜리 실내용 핸드워머도 구입했다. 10월에 잠시 한국에 다녀오면서, 교토에 놀러 오는 친구들을 통해 가을겨울 옷들을 조금 챙겨두었지만, 정작 외투를 제외한 이너나 니트는 한 벌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음 주에 촬영이 있어 이틀 정도 삿포로에 다녀오는데, 그래서 더욱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돌며 '마음에 들면서도 가격이 적당한' 겨울옷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


2. 서울에 살 때보다 높은 월세와, 적은 월급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 신기하다. 처음부터 장 보는 것에 재미를 붙인 덕에 외식을 할 일도 드물고, 우버이츠는 배달비에 앱 수수료까지 붙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배달앱을 들어가는 게 쏠쏠한 재미였던, 인터넷으로 장을 보는 게 편하던 한국에 비해서는 식비를 꽤나 아끼고 있다. 타국에 있다는 핑계로 지인들의 여러 경조사를 거의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큰 몫을 할 것이다. 내가 교토에 와있는 6개월가량 유달리 많은 지인들이 결혼을 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필시 챙겨서 갔을 가까운 이들의 식 또한 많았다. 멀리서 마음이라도 보태고 싶었지만 모아 왔던 한화가 바닥을 보여 어떤 인터넷 결제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고 나면 그저 다정한 말 몇 마디 건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반대로 교토에 와있는 나는 타국에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챙김을 받았다. 집에서 시켜 먹는다는 김치를 두 번에 걸쳐서 보내준 덕에 교토에서 전라도의 맛을 느끼고 있고, 주변에 생색내라며 일본에 인기 있는 한국 과자나 라면을 종류별로 받은 덕에 일터에 자주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갔다. 그 외에도 해장을 냉면 육수로 하는 걸 알고는 냉동 제품을 박스 채로 보내준다거나, 한국에 유행하는 디저트를 사 와 손에 쥐여준다거나. 덕분에 어쩐지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때때로 외롭지만 그게 내가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따로 별다른 보답을 하지 못하고 자꾸 받기만 하는 기분이 어쩐지 스물 초반, 혹은 더 이전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3. 사랑이 무언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어림만 하면서 나는 꼭 좋은 사랑을 해야지, 다짐하던 스물 이전의 나를 문득 떠올린다. 새끼오리가 처음 마주하는 대상이 누구든 그를 부모라 천연덕스레 이해하는 것처럼, 사랑이 오래도록 나에게 가장 귀한 가치일 거라 의문 없이 믿었다. 좋은 사랑은 좋은 어른만큼이나 막연한 것이어서, 일찍부터 그 '좋은'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됐다. 스물 초반 이후 연애를, 그 외 사랑을 닮은 관계들을 몇 차례 거치며 짐작만 하던 것을 겪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랑'의 모양을 차츰 추려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상대로 인해 무너질 각오를 미리 하게 되는 것,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익혀두는 것, 서로의 꿈을 지지하는 것.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것, 작은 오해라도 발견하는 순간 쌓이게 두지 않는 것. 내가 나를 가장 먼저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바탕으로 상대의 작은 말과 행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라고 억측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 삶의 무게추를 상대에게 두지 않는 것. 만남과 과정만큼 좋은 끝 역시 오래 생각하고 자주 시도했다. 다행히 거듭할수록 나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최근에 이별을 했다. 장거리 연애를 포함해 처음 해보는 것들이 유독 많던 연애였고, 새로이 느끼는 감정도 잦았다. 얼떨떨할 정도로 다정과 살핌을 건네받기도 했다. 여전히 사랑이 살아있다 느끼지만, 끝을 결정했다. 우선순위와 물리적 거리, 타이밍 같은 것들로 헤지는 것들을 마주할 자신도, 에너지도 부족했다. 일찍 찍은 마침표를 언젠가는 쉼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함께였다. 이별을 위해 애인이 교토로 건너와 준 덕에 여러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며, 울고 웃으며 기약 없이 다음을 약속할 수 있었다. 잘 지내다 또 만나지자, 라는 말을 끝으로 개찰구에서 인사를 나눴다. 눈앞의 하루를 사는 동안에도 1년은 짧을 것 같다는 마음과 어차피 돌아갈 건데 1-2년 늘린다고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줄곧 부딪히던 상황에서 이별은 '상대가 원하는 만큼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있다'는 부채감을 걷어내주었지만 문득 몰려오는 지독한 공허와 외로움 앞에서 의미나 명분은 자주 무색해졌다.


4. 내가 이전만큼 사랑에 마음을 쏟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심심찮게 발목을 잡혔다. 관계를 대하는 나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내가 연애에서 바라던 모습과 닮아 있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최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갈등 상황에서 감정적인 흥분을 덜어낼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가도, 언제든 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면서도, 함께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기운보다는 덜컥 겁부터 났다. 끝이 어디든 최대한 가보고, 밑바닥까지 봐야 후회가 없다 믿었던 이전의 연애들과 달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상대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힘껏 사랑에 뛰어들어 때로는 세상에 둘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지금 내가 가진 몫으로는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약점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났고, 경험이 쌓였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랑'을 건강하게 주고받기 위해 성장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봤지만 어쩐지 석연찮았다. 지난 긴 연애가 끝나고 소진되었다, 고 느끼던 순간에 잃어버린 것들을 뒤늦게 되짚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하고 사랑할 준비가 덜 되었다, 는 말을 상대에게 건넬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문득 파고들어 고민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걸리겠다는 판단 외에는 전부 흐릿하게 느껴진다. 그저 찾아오는 감정들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오롯이 고민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모두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5. 타국에서의 첫 생활이니 만큼, 타국에서 맞는 첫 새해이기도 하다. 일본의 연말연시는 열흘 정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는 휴일이지만, 외식업에 있어서는 그만큼 대목이기도 하다. 일하는 두 곳 모두 휴일 없이 영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평소보다도 더 많이 일을 하게 되었다. 바쁘게 지나갈 연말 연초가 다행스럽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다. 12월에도 글 한 편 정도는 들고 올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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