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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 있는 심야식당이라는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영화가 아니고 드라마요. 시즌1의 7화에는 사회적으로 보기에 문제가 많은 조카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단골 손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좀 시간이 지나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미국의 한 여성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자신과 자기 주변인물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주변인들은 거의 모두 에이즈 환자였고, 그 작가의 남자친구는 늘 폭력을 휘둘렀죠.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던 그 작가는 종종 얼굴에 멍이 든 자신의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 사진은 고발하려는 용도도, 알리려는 용도도 아니였습니다.
심야식당 에피소드의 그 단골손님의 조카는 결국 감옥에 가게 되고, 그의 아들을 단골손님이 맡아 키우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그 조카를 데리고 음식을 사줄 때처럼 그의 아들을 대하는 손님의 표정에는 충만함이 가득하지요. 그런데 이 손님의 사랑이 나는 기형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저걸 사랑이라도 불러도 될까?’ 하는 근본적인 기시감이지요. 이 손님은 조카와 살게 된 이후부터 남을 위해 헌신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카의 아들이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처지를 동정하며 그에게 다시금 헌신하기 시작하구요. 여기에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요? 그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찾은건 아니였을까요. 그 조카의 아들에 대한 이 손님의 마음은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걸까요. 한편 여성 사진작가의 사진에는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납니다. 남자친구에게 맞고나서 찍은 사진 이후에 또 남자친구와 잘 지내는 사진을 찍기도 하구요. 누군가는 이 작가의 상황을 보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야’ 혹은 사랑보다는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녀는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라고 그녀를 동정할지도 모르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대체 누가 그녀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재단하냐며 ‘그것 또한 사랑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저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가스 라이팅 운운하며 정상적인 삶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도 어리석다고.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보이는 사랑의 단면이 사랑의 절대적인 모습을 대표한다고도 이야기 할 수도 없다고요.
너무 넓어 희미해진 사랑이라는 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와 권위를 완전히 내려놓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것들이 수월 해집니다. 단골손님의 마음도 사랑이며, 여성 작가의 생활속에도 사랑이 깊이 내재되어 있겠죠. 사랑이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고, 사랑을 수식하는 말들이 더 많아지겠지요. 다른 하나는 희미해진 사랑의 의미 안에서, 사랑의 본질 즉, 시대와 장소가 변하더라도 이것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이건 어렵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런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납니다. 혹시 어쩌면 사랑이라는 용어가 원래 희미한 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숙한 사랑, 의존하는 사랑, 완숙한 사랑, 헌신적인 사랑처럼 사랑을 수식해 줄 어구들이 사랑에서는 더 중요하다면 말이죠.
사랑도, 술도 취하지 않으면 지금만큼 찾아지는 것들이었을까요.
이 말이 이렇게 느껴집니다.
도취되는 것들을 오히려 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이라는 말의 권위를 제거했다면, 이제 왜 가끔 어떤 사랑에서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사렁이 아니라 사랑인데도 느껴지는 기시감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요. 그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센서 같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나는 부적절한 사랑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긴 하나 부적절하다고 말이죠.
나는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예견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이 말한 사랑의 끝에 결혼과 이별이 있을거라고 말해왔던 문화와 결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사랑의 끝이 그 어떤 과정을 거치던 이별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합니다. 여기서 이별은 일반적으로는 사랑에서 비롯된 연애라는 관계가 끝을 맺는 이별을 의미할 것이고, 더 나아가면 감정적인 면에서 사랑이라는 현상이 끝남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별을 예견한 모든 만남이 소중한 이유가 무엇일지 늘 궁금했습니다. 어차피 이별할 예정인 모든 만남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냐는 말입니다.
만남은 나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가 겹쳐지는 사건이지요. 만남이 소중한 이유는 자기 자신만의 중력을 가진 두 세계가 겹쳐져 파도가 치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과정을 겪고 난 뒤, 이내 자신의 세계에 혼자 남아 그 모든 폭풍을 견뎌낸, 더 깊어진 눈을 예견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별이 있기에 그 만남이 가치있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만남이 나의 성장을 예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또 이별의 과정에서만 그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사람의 깊어진 눈은, 삶의 필연인 상실을 견뎌낼 수 있는 방향으로의 영혼의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이별이 만남의 아름다움을 근거짓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불안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의식보다 욕구가 앞서기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와중에 어느 순간, 스스로가 왜 이 세계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 어느 순간 던져집니다. 자신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의 시작의 근거나 이유를 찾지 못하니까요. 든든한 나의 존재의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혼자 던져진 갓난아기와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 불안한 사람은 어디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습니다. 나의 존재를 정당화할 근거가 필요한 것이지요. 고대와 중세에는 종교가 정교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고, 근대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말미암은 그 존귀성이 그 역할을 대신했지요. 그것들은 불안한 사람들을 안심시켜주었습니다. 세상에 던져져 자신의 근거를 찾지 못하는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었으니까요. 종교나 인간의 거대 이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관계나 직업, 쓸모를 통해 자신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로써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며 자신의 위태로운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지요. 의사나, 작가, 철학자, 정치인이 되면서 아무것도 아닌 상태의 자신을 잊었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학문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믿으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의 본질이 될 수 없었던 거죠. 당신이 모델일을 하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더 이상 모델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 누가 당신을(심지어 당신 자신조차도) 모델로 여기겠습니까. 그리고 모델이 아닌 당신은 그렇다면 대체 무엇입니까. 이렇게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사실 나를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의 필연이 본질인 것이지요.
어떤 사랑은 나의 존재적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말했던 단골손님단 사랑같은 것 말이에요. 누가 그걸 비난할 수 있겠어요. 우린 모두 너무 작고 약한데. 하지만 이런 것들을 ‘사렁’이라고 부르고자 했던 이유는, 사랑에는 뭔가 더 특별한게 있을 것이라고 믿고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존재적 불안을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는 무언가’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다고 하며 사랑의 권위를 해체해 버리면 해결될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편지가 길어져 로맨스와 키치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버리면 지치니까요. 저는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것을 행위하는 것’을 키치라고 생각하는데, 다음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불안에 대해 당신이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의 권위를 유지하고 싶어할지, 소거하고 싶어할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