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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기초는 평등이다. 그런데 평등은 우정의 법칙이지, 결코 사랑의 법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결혼만이 아니라 사랑의 조건이 평등"이라는 지은이의 말에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사랑의 법칙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숭배하면서 그 한 사람에게 순명하는 것이다. 사랑(일방적인 숭배와 순명)을 우정(평등)으로 변환시키려고 하는 것은 원을 네모 속에 넣으려는 시도와 같다.
사랑의 법칙으로 묶여진 관계는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만남처럼 부조리하고 잔혹하지만, 어느 누구를 일방적으로 숭배하며 순명할 때 가장 행복하고 스스로 원만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면 자아가 확장된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아가 사라지는 것을 일컫는다. 나의 의식은 물론이고 무의식까지 통째 대타자에게 맡길 때, 인간은 최고조의 환희와 순진무구에 이른다. 아이가 된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한다. “진정한 독립과 자율의 확보는 어쩌면 사랑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_장정일, '숭배하는 사랑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中, 시사in > 장정일의 독서일기
한 소설가의 독후감을 읽다 오늘의 편지와 어울릴 것 같아 먼저 적어둡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불안을 담지하고 있다는 말이 당연스럽게 여겨집니다. 우선 태어나는 것부터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으니까요. 어쩌면 그때부터 이유를 모른 채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시작과 그 의의, 근거 모두를 찾지 못합니다. 모두가요. 그 이유를 찾아가는 방식이 삶을 살아가면서 점층적으로 응고되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듯 합니다. 그 이유 중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요.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익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을 투영하는 상대가 계속해서 변화하죠. 그 대상이 사람이기도 하고, 당신이 말했듯 직업이기도 하겠습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정하기 가장 좋은 수단은 직업이겠지요. 내가 나를 무어라 소개해야할 지 알고 있는 일이 생각보다 자존감에 큰 몫을 하더라구요. 저 또한 모델일을 내려놓는 언젠가의 시점에서는 스스로를 무어라 말해야할까, 하는 불안에 지금보다도 더 크게 휩싸일 듯 합니다. 혹은 아예 자유로워지거나요. 어찌 되었든 지금 저는 모델일을 하는 저를 사랑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어떠한 분위기를 취하고, 함께 작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즐겁고 의미있어요. 일을 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일 자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관점에서는 사랑의 권위가 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랑을 어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교류로 국한짓지도 않았고,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더 넓게 두고 보는 것이니까요. 비단 직업이 아니더라도, 앞선 편지에 작은 일에 사랑이란 말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것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제 사랑에 있어서 권위가 어디쯤 있는 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쯤해서, 이 편지의 시작에 제가 인용한 소설가의 말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이 당신이 말하는 사랑의 권위일지, 사실 조금 헷갈립니다. 저는 사랑의 권위를 해체하는 쪽에 가까운 말을 늘어뒀는데, 이 소설가의 말에는 꽤나 공감했거든요. 일대일의 연애관계로 수반되는 사랑에 있어서, 그 감각은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매몰되고, 국한됩니다. 이 사랑이 차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깨어질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약속하고, 사랑을 공유하는 기간 동안 그 감각적 활동에 있어서 충실해야 할 사람이 암묵적으로 결정되지요. 우정보다는 갈구와 투쟁에 가깝습니다. 상대가 정해진 사냥같달까요. 이러한 원초적인 애정의 감각을 우리가 끊임없이, 겹겹이 사랑이라는 말로 가치화시키고 언어화시켰기 때문에 비로소 우정과 헷갈릴 만큼의 다정하고 상냥한 모양새로 비출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도취없는 사랑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애초에 내 감각이 한 순간에 그쪽으로 다 가서 몰리는데, 우리가 사랑에서 도취를 덜어낼 수 있을까요. 서로를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는 법을 익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사랑에 있어서는 꽤나 중요하다고 역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그러한 타자화는, 서로가 필요 이상으로 다치지 않기 위한 완충재 역할 정도에 머무를 때 적당한 것 같아요.
사랑이라 여기는, 혹은 여기던 것 속에서 드는 기시감은 권위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가 겹쳐 행해지는 모든 것이 이질감 없이 들어맞기란 힘든 일이니까요. 비단 나와 내가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 기시감은 언제든 들 수 있는 감각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에 보다 더 절대적인 권위를 심어두고 바라본다면, 그 기시감이 더 견디기 힘들어지기는 하겠네요. 혹은 기시감이 그 권위에 배반하는 무언가로 여겨져 그 사랑의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데 쓰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싶은 기시감은 당신 말대로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센서일 수도 있고, 본질적인 외로움이나 불안에 기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긴 하겠으나 말마따나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어떤 것에도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사랑을 수식해 줄 어구들이 더 중요해진다는 당신의 말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그 여성 다큐멘터리 작가의 이야기에서 저는 기시감이 드네요. 지난 번 편지에서 말했듯, 저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들을 소거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하였던 것과 같은 선 상의 이유인 듯 합니다. 어떠한 육체적 폭력을 가하는 일이 둘의 언어에 있어서 사랑의 방식이 맞다면, 그래서 멍이 든 자신의 얼굴을 사랑스럽다 여겨 사진으로 남긴 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요. 대부분 연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합의가 아니니까요. 그냥 그녀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남긴 것이 아닐까요. 연인관계를 담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진을 가지고서 사랑의 권위를 고민할 필요는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별이 만남의 아름다움을 근거짓는 현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요. 어쩌면 조삼모사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만남과 이별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는 일인 것이 맞고, 만남이 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별이 있는 것도 맞지만 저는 이별이 있어 그 만남이 가치 있어지는 것에는 온전히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별의 존재를 놓치지 않음으로서 그 만남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분명한 이점이겠지요. 마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 이별의 과정으로 인해 성숙해질 수 있으려면, 만남 자체가 그만큼의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때이른 이별이 아름답다 여기던 만남을 섣부르게 마무리 짓기도 하니까요. 또 어떤 이별은 성숙 이전에 트라우마가 되기도 합니다. 가끔은 굳이 이만큼의 역경을 겪어야 싶을까 싶은 이별도 있으니까요. '안전이별' 이라는 말이 괜히 화두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만남 만큼의 깨끗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자주 느낍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것을 행위하는 것이라구요. 얼른 당신이 말하는 키치와 로맨스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편지가 길어졌네요. 이런 저런 생각을 늘어놓는 일이 결국 같은 곳을 다른 말들로 맴도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