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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는 이성에 의해 두 개체 간에 이루어지는 약속 같은 것이지요. 사랑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우리가 넓은 의미의 사랑을 말할 때 합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저는 사렁이 아닌 사랑에 있어서 이성적인 인식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기 때문에, 미숙한 사랑, 비이성적인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합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제가 생각해본 ‘사랑의 권위’의 해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어떤 이데아적인 사랑이 세상에 없다면, 합의없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을까요? 다큐멘터리 작가와 그의 남자친구 사이에는 합의 없는 폭력이 있었겠지만, 거기에 사랑이 없었을까요? 폭력이나 합의없음은 어떤 관계에서 사랑이 없었음을 깨끗하게 증명할 근거가 되어주나요?
아니면 베르테르의 사랑은 어떤가요. 어떤 합의도 이끌어낼 수 없는 혼자만의 사랑.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은요. 일생동안 두 번밖에 마주치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사렁’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정말 사랑에 어떤 이데아가 없다면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특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것은 사랑이다, 아니다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랑 보편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런 ‘사랑’이라는 언어에 어떤 권위도 남아있지 않다면, 단테의 사랑은 사랑인가요? 다큐멘터리 작가의 사랑은 사랑인가요?
이별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하다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죽음의 소리를 듣고 있다고요. 그런데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 그 소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죽음의 소리는 우리가 고요한 가운데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불현듯 불안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게 맞는건가? 하고요. 요즘은 이런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 유행인듯 합니다. 문득 찾아오는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려고 다들 애쓰니까 말입니다. 물론 건실한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가짐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그 성공했다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기분이 당신의 하루를 좌지우지하게 두지 말아라’같은 이야기요. 연예인들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기분전환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법 같은 것들은 좋은 기술들입니다. 하지만, 종종 들려오는 죽음의 소리가 불쾌하다며 그것을 등 뒤로 치워 버리기만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죽음의 소리를 계속해서 외면한 대가는 삶이 지게 될 테니까요. 죽음의 소리는 요컨대 이런겁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텔레파시 같은 것이요. 내가 정말 이것을 원했는가? 하고 묻는 질문과 같은 것이지요. 이런 소리는 분명히 나의 지금 선택에 도움을 줄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별도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깨끗한 합의는 이별이 닥쳤을 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별이 가치있는 시기는, 그 이별이 아직 먼 나중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입니다. 이별을 체감하지 못할 때 이별은 비로소 기능합니다. 그런데 정말 깨끗한 합의가 전제된 이별이 ‘이별을 예견한 모든 만남이 가치있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필요 할까요? 당신이 인용한 구절은 나에게 사렁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해하고 싶긴 합니다.
편리한 명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들 말입니다. 어떠 친구는 결혼한 이후에 자기는 노는것도 생각 안나고, 결혼생활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결혼 6년차입니다. 그 친구가 진심인지 아닌지 나는 모릅니다. 그런데, 결혼을 이미 한 입장에서, 자신은 너무 놀고싶고, 결혼생활은 후회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나의 친구처럼 말하는 것이 속이 편할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노는 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그 친구는 고통받을 테니까요. 어떤 책에서는 소련의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떠난 여류작가가 미국의 한 상원의원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원의원은 이 여류작가를 차에 태우고 관광을 시켜줍니다. 아이들은 차에서 내려 공원으로 뛰어가지요. 상원의원은 운전석에 앉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잔디와 아이들을 보십시오. 이게 내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마치 잔디는 자라지 않고, 아이들은 뛰어놀지 않는다고 상원의원이 확신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여자에 대한 동정심의 표현인 것 처럼 말입니다. 이 여자는 그 상원의원의 표정을 체코의 5.1행진에서 본적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것이 공산주의 행진의 연단에 서서 그들의 연단 아래에서 축제를 즐기는(실제로는 즐긴다기 보다는 마치 자신들이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보내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키치입니다. 그래야 할것만 같은 것. 내가 지지하는 공산주의체제의 축제에서 당연히 내가 즐겨야 할 것 같은 마음. 푸른 잔디와 뛰어노는 아이들에게서 행복이 느껴진다는 상원의원의 말. 만약 그 아이들이 어느순간 그들 가운데 한명을 집단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면 어떨까요.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걸까요. 상원의원이 해당 장면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의 근거는 온전히 그의 감수성에 있습니다. 키치는 감수성의 독재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런 편리한 명분, 쉽게 내뱉으면 보통 정답이 되어버리는 문장들. 내가 사랑에 권위있는 실체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이유가 여기에 또 있습니다. 사랑은 너무 쉽게 이 명분이 되어버립니다.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사랑이 있고, 지탄받는 사랑이 있으니까요. 모성애는 정말 있는걸까요. 영원한 사랑은 정말 있을까요? 흔히 말하는 영원한 사랑안에는 성욕, 우정, 소유욕, 대안이 없음 등 많은 실체들이 잠복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요. 내가 사랑에서 키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째 사랑에 권위가 없다면, 그것이 키치와 뭐가 다른가 싶어서 말이지요. 숙고하지 않고 뱉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프게 하는건, 보통 상대방보다는 나 자신인 경우가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