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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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사랑이 없는 것과 사랑이 아닌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아니다, 라고 해서 그곳에 사랑이 없었다, 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 사랑에 권위, 이데아가 어떻게 덧씌워지는 지, 또 사랑이 이데아라면 우리는 어떠한 특정 상태를 사랑이라 불러야할 지, 에 관해서 (제게 있어 그렇게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든, 사랑에서 감정을 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현상학적인 것이지요.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흐릅니다. 그때는 사랑이 있었을 지 몰라도, 지금은 아닐 수 있지요. 합의없는 폭력이 일어난 것과 그곳에 사랑이 있었음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한 사랑 자체에서 합의는 우선순위가 아니지요. 사랑을 중심으로 특정 관계를 맺게 될 때는 분명 어떤 합의가 생겨나고, 또 그것이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중요해지겠지만, 사랑이 처음 발생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의 합의가 꼭 필요치는 않습니다. 연애와 결혼이 다르다, 라고 이야기하는 일이나, 짝사랑에 관한 서사가 미디어에 수없이 묻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어떤 상황이느냐에 따라서, 합의 후에 사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이 앞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이 합의를 생성하고 또 파멸시킵니다.


짝사랑도 사랑이지요. 서로 합의에 의해 사랑하고 관계를 맺어도 우리는 상대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일생동안 두 번 뿐이 마주치지 못하더라도,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한다해도 그것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에 힘이 붙는 것은 스스로 그것이 사랑임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종교활동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도 비슷한 결이라 생각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스스로의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때, 그것이 합의를 만들어내든 권위를 만들어내든 하는 것이라고 느껴요. 그러니 다큐멘터리 작가의 사랑도, 단테의 사랑도 그들이 그렇다면 사랑이지요. 다만 제가 다큐멘터리 작가의 연애관계에서 사랑에 초점 맞추고 싶지 않아했던 것은, 그 안에서 일어난 폭력이 '사랑이라는 말 아래 합리화된 합의없음'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는 것과 폭력이 있는 것 사이에 연결고리를 두는 것부터가 사랑에 필요이상의 권위를 씌우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니 그랬다, 라는 말로 자행된 폭력이 일상에도 얼만큼 스며있는지 경험적으로도 통계적으로도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제가 앞전에 했던 말을 빌려 다큐멘터리 작가의 애인이 사랑해서 때렸다, 라고 한다면 그는 스스로 그 관계가 사랑임을 인식한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허나 사랑으로 붙은 힘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한다면 본질 자체가 흐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작가의 사진에서 고발의 목적이 드러나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그 관계를 건강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말한 비이성적인 사랑이겠지요. 미숙한 사랑일테고요.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주거지, 연락처, 직장, 가족 및 친구관계, 생활 습과, 행동반경 등 모든 요소가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범행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피고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 및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하면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던 끝에 피해자르르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2018고합OOO, 김정민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_오마이뉴스,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 분석> 중


그래서 저는 어떤 특정한 사랑,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랑이 맞고, 사랑이 아님을 구분할 수 있는 무엇이 생기는 일이 좀 무섭습니다. 때때로 이데아나 권위를 덧붙이는 일은 더 믿기 위해 혹은 더 믿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실 같기도 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고, 그래서 지나간 관계나 목도한 것들을 '서랑'이라고 명시하는 것도 같은 선 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 언젠가 책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순수를 강요하는 일이다, 라는 식의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순수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뭐가 더럽고 뭐가 또 깨끗한 것이겠어요. 당신은 사랑에 권위가 없다면, 그것이 키치와 뭐가 다르겠냐고 하였지요. 실은 사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 중 하나일 뿐이죠. 다만 그것에 가치를 두고 권위를 씌우는, 혹은 씌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을 뿐입니다. 저와 당신도 그 중 하나일테구요. 누군가 생각하는 사랑은 당신이 생각하는 키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사람이 불행하다고, 혹은 사랑을 모른다고 우리는 확언할 수 있나요 ? 사랑이 쉽게 내뱉으면 보통 정답이 되어버리는 명분 같다, 라는 말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미디어에서만 해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연애를 권장하지요. 예전보다는 덜해졌다지만, 여전히 소개팅을 하는 컨텐츠가 조회수가 잘 나오고, 연애 서바이벌에 나온 사람들이 쉽게 인플루언서가 됩니다. 연애에는 돈이 들고, 그 말은 연애가 돈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연애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 하자가 있는 사람인 양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래도 점점 특정 연애형태만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쪽으로 향하고 있고, 지금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듯 싶으니 후에 기회가 된다면 더 이야기 합시다. )


상원의원과 작가의 이야기도 흥미롭네요. 의원과 작가와의 관계나 상황을 따져보았을 땐 상원의원의 말 속에

공산주의 국가와 반대되는 자유로운 국가 분위기에 대한 은근한 뽐냄이나 자부심, 애국심, 혹은 묘하게 작가에 대한 동정심이나 깔봄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나 이 상황이 당신이 말하는 사랑에서의 키치를 설명할 수 있는 지에는 의문이 드네요.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이 실은 한 명을 따돌리는 중이고, 혹은 갑자기 눈 앞에서 당신이 말하는 그런 구타 장면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상원의원이 그 순간 예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 않았을까요? 감수성의 독재라기보다는, 의원의 경험과 학습된 바가 합쳐져 자연스레 나온 판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학습된 바에서 작가가 읽어낸 것이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축제 연단의 눈빛인 것일테구요. 저는 당신이 말한 상황을 상상하고 고민해보다 문득 고등학교 정문에 내걸린 ‘학교폭력 없는 학교’ 현수막이 떠올랐답니다.


숙고하지 않고 뱉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프게 하는 건 보통 상대방보다는 나 자신, 이라는 말에도 조금 의문이 듭니다. 숙고하지 않았음이 과연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까요. 상대를 찌르고 돌아오는 부메랑에 스스로가 또 찔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별에서 깨끗한 합의는 무엇보다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었는데 어째서 그 만남의 가치를 설명하지 못할까요 ? 당신이 일전에 조금 더 깊어진 눈을 가질 수 있는 때는 그 관계가 끝난 후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별이 아직 먼 나중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면, 그 관계에 조금 더 편안히 녹아들테고, 어쩌면 나태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 죽음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사는 우리와, 관계 안에서 이별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사는 우리 사이 다른 점은 무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