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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가 오해를 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오해한 부분도 있는 것 같구요. 나는 당신이 다큐멘터리 작가의 상황은 사랑이라고 여길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줄 알았거든요. 처음 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사례를 이야기했던 이유도, 보통은 쉽게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을 만한 사건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전에 폭력관계에 놓여 있는 두 연인을 보았을때,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이용하려는 마음과 홀로 서는 것이 두려워 타인에게 기대려는 마음의 결합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사랑의 보편성을 스스로 제거해보는 과정에서, 그 관계 안에 저 마음 뿐 아니라 일말의 사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혹은 이용하려는 마음과, 타인에게 기대려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당신도 그들의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에는 사랑이 없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앞서 꾸준히 사랑 보편에 대해 긍정하지 않았던 당신의 이야기와 다른 것 같아 궁금증이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편지에서 당신이 그들의 마음과 폭력을 구분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케이스에서 당신이 사랑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싶었던 것 뿐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당신이 오해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다큐멘터리 작가의 애인이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랑을 명분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자행된 폭력이였을 뿐이고, 저는 ‘그 폭력이 그들 사이의 마음이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사랑에 대한 일반론을 너무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반성했던 것이지요. 당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을 명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명분이 아닌, 그저 폭력도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폭력의 부정함을 논할 때, 사랑의 유무 여부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저도 동의합니다.
오해를 넘어, “사랑에 힘이 붙는 것은 스스로 그것이 사랑임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라는 당신의 말에 공감이 갑니다. ‘권력은 사람들이 그곳에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 저기에 권력이 있네?”하고 생각하면 거기에 권력이 생긴다는 말이지요. 권력도 힘도 ‘power’를 쓰기 때문에 비슷하게 들리는 걸까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권력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그곳에 권력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럼 인식하기 전에는 사랑이 거기에 없었을까요. 물론 당신 말대로 인식은 '사랑에 힘이 붙는' 수단에 의미가 있기에, 그전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극단적으로 ‘인식 이전에는 사랑이 없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혹은 ‘인식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극단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따져보고 싶습니다. 스스로 누군가에 대한 관심 / 육체적 끌림 / 단순한 호기심 / 동경이 바로 ‘사랑’이라고 여기기 전에도 정말 그것이 사랑이라고 부를 만 한지 말이지요. 사랑은 서서히 오는 걸까요? 아니면 어느 인식의 순간에 비로소 다가오는 걸까요. 이 지루한 연속성 논쟁이 바로 ‘사랑’을 다른 호의적 표현과 구분하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니 제가 사랑 보편, 즉 사랑의 권위에 대한 관념을 없애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조금 추가하자면, 당신이 사랑에 권위를 부여하는것을 무섭다고 표현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절대적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문제를 발생시켜 왔지요. 절대성에서 절대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이분법이 나왔으며, 이분법에 선과 악의 개념을 투영시켜 계몽주의를 폭력으로 물들게 한 역사를 인류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현대의 감수성은 확실히 절대적인 개념을 부정하는 추세이긴 한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사랑 보편이 있다면,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내가 지금껏 해온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니까요. 이것은 무섭지요. 하지만 이것이 폭력까지 나아가려면, 이 이념이 타인의 감정에 대한 부정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절대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자꾸 사랑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기도 하구요. 또, 절대적인 사랑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행하지는 않을겁니다. 다만, 점성술을 과학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소속을 따지기 어려운 사랑의 범주를 명확히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뿐이지요.
미디어에서 우리에게 연애를 권장한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자세하게 다루면 좋겠습니다만, 간단하게만 이야기를 하자면 소개팅을 하는 컨텐츠가 돈이 되는 것은 그것이 소비자에게 본능적인 충족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안들기도 합니다만, 시장에 반응하는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자들을 부정의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이야기한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사랑과 지탄받는 사랑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랑이나, 동성애(동성애는 요즘 권장된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사랑이라는 가치가 다른 사실들(이를테면 나이, 성별 등)에 의해 변화한다는 믿음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숙고하지 않고 뱉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프게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물론 상대방이 그것을 못 느꼈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겠지요. 숙고하지 않고 뱉는 사랑이라는 말을 저는 그렇게 악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키치일 뿐이지요. 그리고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키치에 열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그것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구요. 하지만, 그것이 키치, 즉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뱉은 말이라면(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 적절한 순간이라는 본능적인 판단에 의해 뱉은 말이라면 -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쭉 있어 왔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순간에만큼은 그가 마음을 다해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음에도 뱉은 말이라면 말이죠.) 그 순간은 사랑일까요. 꼭 기념일에 근사한 레스토랑을 가야할 것 같은 마음이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마음이나, 그 자리에 잘 꾸민 옷을 입고 가야 할 것 같은 마음, 저녁 식사가 어느정도 끝나고 와인을 몇 잔 마셔 기분도 좋아진 참에 마침 창밖으로 불꽃이라도 터졌을 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마음 같은 것들 말입니다. 더 자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느정도 가까워진 이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를 하는 남자나, 반존대(반말과 존댓말을 섞는 것)를 열심히 구사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당연히 나쁜 것은 아니지요. 훌륭한 처세이거나, 센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임은 불확실하고 키치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상원의원의 말과 같습니다. 물론 키치라는 비판은 당사자의 마음상태가 어땠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불합리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불꽃이 터지는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고 애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정말 어떤 이성에게서 보호본능이나 귀여움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는 것인지 모르는 일이며, 반존대라는 것이 사회적인 밈으로 작용하기 전부터 그것이 자신의 말투였던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키치로 느끼기 굉장히 쉬운 이유는 그것을 키치로 느끼는 사람이 피해의식이 있어서가 아닌 키치에 어떤 실체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상원의원의 행복론과 체코의 5.1행진을 의식적으로 즐기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키치가 보이는 것도, 그들이 진심일 수도 있다는 너무 당연해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비판을 제외하면, 키치에 어떤 실체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진심과는 다른 무언가겠지요.
죽음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사는 우리와, 관계 안에서 이별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사는 우리는 구조적으로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목소리가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하듯, 이별이 만남을 가치있게 한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모든 만남이 조금 더 깊어진 눈을 가지는 ‘관계가 끝난 후’를 예견하기에, 필연적으로 이별을 겪게 되는 그 모든 만남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끝맺음이 얼마나 완성도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그 만남이 의미있는 이유를 설명 하는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구요. 당신 말대로 이별이 아주 먼 얘기처럼 느껴질 때면, 쉽게 관계에 취하게 되고, 이별을 잊고 나태해 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의 목소리를 들으며 만남을 이어 가야겠지요. 그 행위가 만남을 가치있게 해 줄테니까요.
제가 말한 키치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당신이 이 키치라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세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더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