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카톡 창을 내리다 엄마의 상태 메시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는 반가워 연락을 했다. 이름을 바꾸고 생각보다도 여러 문장이며 가사에서 이름을 발견한다. 우체국이나 주민센터에 갈 적마다 직원분들이 '닿'의 철자를 보고 짐짓 고민하시는 것을 지켜보다 'ㅎ' 받침 맞아요, 하고 머쓱하게 웃어보이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 든다. 사실 모두의 입에 붙어있는 말이라는 걸 노래가 알려주고, 문장이 알려준다. 콘텐츠를 만들고, 모델 일을 하며 지었던 예명이 진짜 이름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금방 이루어졌다. 결심을 하고 신청을 하기까지가 길었을 뿐. 법원으로 날아간 개명신청서는 싱거울 만큼 별 문제없이 허가증을 받아왔다. 원래 이름이 싫었다기보다는 갈수록 쓰고 있는 이름에 대한 애착이 더 붙었다. 이 이름일 때의 내가 더 나답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은행업무나 파트타임이 아닌 이상 원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가족을 제외하고 내가 가깝게 여기는 이라면 더더욱 나를 내가 지은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랐다. 아직도 그들이 애정을 묻힌 채로 내 이름을 불러올 때면, 어쩐지 이해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다소 독특한 모양새의 이름을 쓰게 되면서 그것이 과연 '진짜' 이름인지에 관한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내 이름 독특하다, 짱이지.' 하고 싶어 지은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대답의 친절도는 조금씩 떨어졌다. 일 특성 상 새로운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니 피로도는 금세 올랐고, 굳이굳이 본명을 묻는 사람들에게 답을 하는 것이 조금 싫어질 정도가 되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내 이름이 진짜인 지 아닌 지가 더 중요한가? 본명이 아니더래도, 이 이름을 통성명에 쓰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하는 모난 생각들이 먼저 들어찼다.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일이라 느끼고, 뒤따르는 이름에 대한 칭찬도 많았지만 칭찬받고 싶어서 이 예쁜 이름을 지은 것은 또 아니니까. 반복되는 질문에서 오는 작은 톤이나 뉘앙스만으로 설명하기가 싫어질 때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초면에 '닿아요? 진짜 이름이 닿아예요?' 혹은 '진짜 이름은 뭐예요?'하고 툭 던지는 경우(닿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하고 밝혔음에도). 분명 무례하다고 느꼈음에도 궁금해하는 상황이 또 이해는 가니까 기분 나빠하는 내가 예민한건가, 로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괴로웠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름이 좋고, 계속 쓸 것이고, 그때부터 그냥 '진짜 이름이예요. 고맙습니다.' 하고 웃으며 넘겼다. 내게 플러팅을 하겠다고 '그럼 나는 너를 진짜 이름으로 부를래.' 식의 말을 나직하게 건네던 누군가도 떠오른다. 싫다고 했다.
홧김에 개명을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을 바꾸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을 세다 보면 진짜 그만큼이나 원하는가, 하는 일종의 자기심문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을 한참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결정이 났다. 나는 이미 닿아라는 이름을 쓰며 살고 있는데, 왜 이 마음들을 계속 떠안고 가야 하지? 개명을 위한 노력과 설득이 그렇게 힘든 걸까? 원하지 않더라도 으레 그렇게 하니까 자리에 따라 본명을 쓰고 나면 또 상대가 원래 이름이 이거였구나, 근데 왜 이 이름을 안 써? 하는 식의 대화를 걸어오고, 어느 순간 본명을 친근하게 부르는 상대에게 어떻게 거절의 의사를 밝힐까 고민하는, 그 과정을 왜 매번 감내하며 살아야하지? 나는 할머니가 되어도 닿아 할머니라고 불리고 싶은데.
그렇게 지난 스물 여섯의 생일 선물로 개명 허락을 받았다.
개명을 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개명허가서를 보낸 구청에서 오전 께부터 철자가 틀린 것 같다며 이름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확인전화를 준 것, 은행 어플에서의 이름이 바뀌고 핸드폰 청구명세서의 이름이 바뀐 것, '닿아님'으로 촬영을 하고 계약서를 쓸 때 더이상 본명을 써야하는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정도. 더이상 진짜 이름이냐는 질문에 주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큰 소득이다.
쓰던 맥북에서 법원사이트며 개명신청서 양식이 돌아가지 않아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친한 작가님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윈도우를 빌려 신청을 하고, 두 달이 조금 안되어서 전화선 너머 애인의 목소리로 개명 허가가 났음을 들었다. 모두 내 이름을 처음부터 편안히 불러준 사람들이다. 내가 지은 내 이름으로 사는 삶은 이리도 따뜻하다. 내 주변을 가깝게 채우는 사람들은 별 물음없이 나를 닿아라 부르고, 나는 더이상 성가신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느낀다.
아, 그리고 닿아 할머니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