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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Jan 31. 2022

삶 한가운데 사랑을 둘 지

 연휴가 이토록 연휴다웠던 적이 있던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주말과 평일, 공휴일에 대한 감각이 그다지 없는 삶을 지속해왔다. 파트타임을 하는 날, 하지 않는 날. 촬영이 있는 날, 없는 날 같은 기준으로 일주일이 나뉘었고 한 달이 채워졌다. 주말이 다가오는 게 어느 때보다 반가운 요즘은 일하는 카페를 나가는 요일도 고정되어 있고, 공익 생활 중인 애인과는 주말이나 되어야 만날 수 있다. 그 와중에 맞게 된 설 연휴는 말 그대로 연휴인 것이다. 나와 내 주변 가까운 이들의 바삐 흐르던 평일이 잠시 멈췄다. 평소 같으면 퇴근했다며 전화를 할 시간에 애인과 마주 보고 잔을 부딪힌다. 선복무를 하느라 훈련소를 이제야 가게 된 그의 시한부(?) 뒷머리를 매만지며 그가 없을 3주가량을 계획한다. 본가에 가서는 설음식을 핑계로 시장과 마트에 차례로 들러 순대와 맥주를 사고, 아빠를 닮아 술을 좋아한다며 나에게 눈을 흘기는 엄마에겐 딸이 가져온 와인이 딱 엄마 취향이지 않냐며 능청을 부리는 하릴없는 밤이 흘러간다. 그렇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가족과 애인을 번갈아 마주하는 요 며칠 새가 참으로 평화로운 것이다. 지나간 건 이틀뿐인데 계속 이래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걸쳐서 영화 '노트북'을 보았다. 혼자 사는 집에는 TV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영상물을 긴 호흡으로 혼자 보는 일이 잘 없다. 애인을 만나는 날에나 그 혹은 나의 노트북으로 철 지난 예능이나 드라마를 챙겨보는 것이 전부. (철이 지날수록 명작은 되려 더 명작이더라.) 해리포터도, 셜록홈스도 다 그 덕에 보았다. 본가에 갈 때면 대부분 TV가 틀어져 있고, 다 같이 마루에 둘러앉아 있을 때면 아빠는 꼭 영화를 한 편이고 같이 보고 싶어 하지만 나 홀로 취향이 가족과 반대인 탓에 아빠가 원하던 대로 된 적은 잘 없다. 어제는 가족 모두 딱히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없길래 내가 리모컨을 쥐고 넷플릭스 목록을 넘기다 '이거 좋다고 했는데 나 여태껏 못 봤어!' 하고 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젯밤 삼분의 일 가량을 보고, 오늘에 이어 엄마와 한 편을 다 보았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되던 여름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옮겨 붙던 노아와 앨리를 보는 동안 엄마와 나는 드문드문 말을 주고받았다.


'저건 진짜 영화다.'

'모든 연애의 시작은 영화 같지.'

'(웃음) 너는 저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어?'

'음.. 그래도 엄마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많이 좋아했지. 엄마는? '

'엄마는 연애를 많이 안 했어서, 지금 생각나는 사람도 별로 없어.'

'나는 내가 사랑에 눈이 멀면 여러 일들을 뒤로 미루게 될 걸 알아서 완전히 빠지지는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 고2 때쯤 처음 연애라는 게 해보고 싶었었는데, 직감적으로 나는 지금 연애하면 대학 못 가겠구나 싶어서 말았지.'


사랑이 나에게 너무 중요하단 걸 알아서 일순위로 두지 못하는 꼴이라니. 처음 이게 사랑이구나, 싶은 것을 맛봤을 땐 내 일상에 사랑 하나만 두는 것으로 넘쳤다. 애인을 볼 수 있는 날에는 부러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고, 그도 그래 주기를 바랐다. 미루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미에도 이런저런 합리화를 하며 사랑에 더 시간을 쏟았다. 그러다 끝이 왔을 때는, 처음 맛보는 누군가의 부재를 한 몸으로 받아낸 나를 달래고 다시 일으키는 것만으로 몇 달 동안 내리 넘어져야 했다. 아무래도 처음이 강렬했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후에도 몇 번의 귀한 이들과 날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지금의 연애관이랄 게 만들어졌다. 애인의 품 안이나 등판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보다 마주 잡은 손에 같은 무게감과 안정감을 쥐어주는 것이 먼저라는 것,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것 안에는 어떠한 폭력도 없다는 것. 나란히 걷다가도 가끔은 그를 앞세워 먼저 보내야 할 때도, 내가 그래야 할 때도 있다는 것. 최소한의 공백과 거리가 있어야 우리는 더 자주 웃고 안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지금의 나에게 노아와 앨리는 뜨거움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만난 게 열일곱이더만. (나이 가지고 이러니까 너무 늙은이 같지만) 시간이 꽤 흐른 후에 다시 재회한 그들에게도 나라면 단번에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결정이 있었고, 그 결정은 결국 열일곱의 뜨거움에 기반한 것이었다. 엄마의 '진짜 영화네.' 하던 말의 중추도 나와 비슷한 데 있지 않았을까. 열일곱 앨리와 약속했던 집을 고치고 새로 짓는데 오랜 시간과 돈을 쓰면서 집이 완성되면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는 노아나, 안정적인 결혼을 앞두고 결국 노아를 택하는 앨리, 매번 모든 걸 잊는 앨리의 손을 붙잡고 계속해서 둘의 이야길 들려주는 노아는 사랑이 분명 가장 앞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랑을 맨 앞에 두는 이들이 언제부터 영화에나 있을 법한 존재가 되었을까.


나에게도 사랑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래서 나에게 가장 먼저 챙겨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된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부터 넘어진다면 어느 누구를 건강히 아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늘 진리처럼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나보다 애인을 사랑한 끝에 나는 참으로 허했으니까. 그 누구도 나보다 나를 잘 알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내가 나를 모르겠대도, 실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 정말로 막연한 것인지는 결국 나만 아는 일이니까. 그래서 누구도 나를 나보다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랑이 무지에서 출발하지만, 다 알면서도 하는 사랑이 단단하게 나를 붙잡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은 나일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그 마음을 주춧돌로 내 앞의 애인을 사랑하고, 떨어져 사는 가족에게 애틋함과 사랑을 전한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들에게 지지와 사랑을 보내고, 더 이상 친구라는 것 외에는 공통분모로 묶일 일 없는 오랜 친구들을 그저 사랑한다. 그렇게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나는 우연히도 완벽하게 사랑을 만들어내는 공장장으로 기능한다.


사랑에는 계산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계산기를 내던지고 싶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믿는다. 내가 나를 지키느라 지치고 겁이나 못한 말이 있지만, 어느 날에는 그저 꼭 껴안고 다 퍼부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그럴 때는 그냥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다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수 이소라의 젊은 날을 담은 영상이 유독 기억에 남는 주말을 보내고 맞은 연휴.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당신이며, 그 사랑을 좀 더 잘해보기 위해 나는 자주 골몰한다는 걸 나도 당신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덩달아 샘솟는다. 이유를 붙이지 않는 일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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