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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Feb 08. 2022

누구도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무심

적당한 무심함이 주는 위안에 대해 생각한다. 일하는 카페는 공간이 넓은 데 비해 난방이 수월하지를 못해서, 오랜 템포로 앉았다 가는 손님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솟는다. 히터 하나로는 공기가 데워지질 않아서, 작은 전기난로 두 개, 온풍기 하나를 군데군데에 두고 쓰다가 얼마 전 등유 난로를 들였다. 커다란 기름 탱크를 실은 트럭이 오면 빈 통을 양손에 들고 내려간다. 주유해주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20L짜리 두 통을 받아 들 때면, 꾸준히 운동 중인 스스로를 칭찬하게 된다. (마치 데등유리프트) 하지만 뿌듯함만 남기고 온기는 남기지 않는 그.. 공간이 크고 뻥 뚫려 있어서 그런지 난로는 등유만 열심히 먹을 뿐 큰 효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하고 있다. 


'언니, 요즘 작업 테이블에 앉는 손님들 거의 다 겉옷을 안 벗으셔. 온도를 더 높이자니 기름이 너무 빨리 닳아. 이틀에 한 통 꼴이야. '

'그래? 그래도 이왕 산 거 온도 더 올려서 써볼까.'

'이틀에 한 번씩 기름 받아 쓸 수 있으려나, 우리?'

'미리 시켜두지 뭐. 일단 해 보자.'

'그러자. 여분 담요도 좀 사두고.'


기록해두었던 지난 계절들.


일하는 카페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몰입하기 좋은 곳이다. 노트북 혹은 책과 함께 느직이 있을 곳을 찾는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작업할 수 있는 곳. 동시에 커피 맛도 꽤나 신경 쓰는 곳. 사용하는 원두의 기준이 되는 맛을 정해두고, 오픈 준비를 할 때마다 그날의 기온과 습도를 고려해가며 기준점에 가까워지도록 맛을 잡는 과정은 아직도 어렵고 신기하다. 전체적으로 낮은 조도와 큰 창으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자연광의 합이 좋은 공간이라, 때와 날씨에 상관없이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가 있다. 어느새 나는 이곳의 사계절을 모두 보았는데, 가끔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별 관심이 없는 숲의 숲지기가 된 기분이다. 숲의 생물과 숲지기 사이에는 분명 어떤 엷은 유대감이 존재하지만, 딱 거기까지인. 서로의 삶에는 끼어들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숨 쉬던 게 어쩌다 보니 '공생'이 되어버리는, 무심에서 출발한 정(情)이 정을 위한 무심으로 변하는 그런 고요한 모양새. 

예전에 일하던 빵집은 그곳을 찾는 이들의 얼굴을 기억할 일이 잦았다. 요즘 시험기간인가요? 괜히 살갑게 말을 한마디 더 붙이고는 했고, 시험 잘 보세요- 요건 서비스입니다, 하고 남는 빵을 재량껏 건넬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건넨 것들이 더 따뜻한 마음으로 되돌아올 때 느꼈던 기분은 가게의 빵 굽는 냄새만큼이나 좋았다. 방학을 맞아 유럽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전생 같은 말.. 퍼킹 코로나!) 단골손님에게 핸드크림 모양의 밤 잼을 받았던 것이나, 일을 곧 그만둔다고 이야기했던 손님에게 어딜 가나 잘 지내실 것 같다는 내용의 쪽지를 건네받았던 건 아직도 불쑥 나타나 잔잔하게 마음을 데우는 기억이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오랜 시간 손님들과 한 곳에 머물지만, 그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부러 애를 쓰기도 한다. 처음엔 너무 무심해 보일까 싶어 마음이 쓰였는데, 요즘은 이곳 특유의 공간감이 만들어낸 무언의 약속이라 생각하고 즐기고 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져 테이블 상황을 살필 때나, 멀리서 봐도 무언가 필요해 보일 때, 아래층에서 나눠주신 간식의 양이 많아 나눠 드릴까 싶을 때 말고는 대부분 관심을 떨어뜨려둔다. 그리고 주문이 없을 때면 나도 바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펴두고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핸드폰으로 영상편집을 한다. 책을 읽을 때도, 스케줄러를 정리할 때도 있다. 가끔은 마감을 끝내고 혼자 남아 마저 작업을 하기도 한다. 불이 다 꺼진 커다란 공간이 조금 무서울 때도 있지만, 스탠드만 켜 둔 채 담요를 덮고 앉아 오롯이 할 일에 몰입하는 저녁은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데 꽤나 도움이 된다. 

 어찌 됐든 겨울이고, 그렇게 바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있자면 늘 추워져서 최대한 따뜻하게 입고 출근을 한다. 허벅지까지 오는 니삭스를 바지 안에 신고 나오거나, 교복을 입을 때처럼 검정 기모 스타킹에 귀여운 양말을 받쳐 신는다. 담요 대용으로 쓸 목도리를 챙기기도 한다. 며칠 전 주말에 애인을 만났을 때, 물기가 채 다 마르지 않은 화장실에 급히 들어갔다가 양말이 젖어버린 그에게 그나마 큰 양말을 꺼내 주었다. 


'자기, 이거 뒤꿈치가 터졌네.'

'엥? 그러네'

'(웃음) 내가 신고 버리지 뭐.'

'근데 왜 양말은 구멍 나면 꼭 버릴까? 옷은 기우고 꿰매면서.'

'그러네.'

'옷보다도 유독 양말에 구멍 나면 더 부끄러워하잖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신경 안 쓰는 사람처럼 보일까 창피한 건가? 약간 우리나라 정서 때문에 더 그런가? 뭔가 내밀하다 싶은 건 더 감추고 티 나기 전에 없애 버리고.. 성교육 제대로 안 하는 것도 그렇고 우울도 자주 그런 취급받는 것 같아.'

'오.. 그거 글에다 써요.'

'오.. 그럴까? '


그러다 까먹어서 애인과 외출한 후 양말은 또다시 빨래통으로 들어갔다. 깨끗이 빤 걸 버리기도 뭐해서 그냥 얌전히 건조대에 널어 두었다. 옷에 비해 너무 자주 빨아서 구멍이 잘 나나? 아님 걸을 때 너무 뒤꿈치부터 걷나? 중학생, 고등학생 때부터 신던 양말이 아직도 조금씩 남아있는 걸 보면, 그저 수명이 다 할 때가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중학생 때 신던 목 짧은 양말을 신고 카페 출근을 했다가, 크루 언니가 그걸 보고 잔뜩 놀려댔다. 그 후에 괜히 미안해졌는지 언니에게 양말세트를 선물 받았다. 그것도 목이 긴 짱짱한 것들로다가. 앞으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헤질 대로 헤진 거 찾아서 들거나 입고 언니 앞에 서성여야겠다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었다. 그럼에도 여지껏 버려지지 않은 낡은 양말들은 어차피 뒤꿈치인데 뭐, 신발 벗을 일 없는 날에 신지 - 신발 벗음 어때, 시원한 뒤꿈치로 살지 - 하는 나의 무심함 때문이기도 하고, 한 두 번은 더 신고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새것을 신다가도 올이 나가는 순간 쓰레기통행이 되던 수많은 스타킹과 양말을 향한 애도 또한 조금 섞여 있다. 

기우지 않고 버려지는 여러 작고 큰 구멍들이 나는 왜 괜히 아쉬울까. 교실 의자에 걸렸는지 검정 기모 스타킹에 꽤 큰 구멍이 났을 때, 벗어던지기보다 구멍 안을 검은색 컴퓨터 사인펜으로 칠하던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의 내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부끄러움보다도 조금 더 써 볼 수 있는 걸 냅다 버리는 일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라는 가짐으로 살고 있는 지금도 그러한 사고는 크게 변치 않았다. 물론 가끔은 생각보다 관심이 많네, 싶은 일들도 일어나지만 그 관심에 쫓겨 살거나 그들이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일 생각은 저 깊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떤 오기에 금방 묻힌다. 내가 싫은 건 다른 사람도 싫을 테니,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굳이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동하면 어련히 이야기하겠지, 하는 식의 믿음을 적당한 거리와 함께 무심함으로 내비치는 것. 하지만 그 중심에는 늘 다정함을 두는 것. 그게 지금까지의 내가 찾은 가장 현명하면서도 다치지 않고 관계를 대하는 방법이다.


이 글을 며칠 새 이어 쓰는 동안 장소가 여러 번 바뀌었다. 일하는 곳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잠시 본가에 들렀다가 지금은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로 왔다. 일하는 곳과 닮아 있는 분위기의 공간이 집 앞에 생겨 좋다. 내가 건넸던 적당한 무심함을 오늘은 손님이 되어 받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적당한 무심함이 주는 위안에 대해 생각한다. 양말도 나의 무심함 덕에 우리 집에서 며칠은 더 따뜻해할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덩달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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