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잔이 깨졌다

양희은 - 꽃병

by 김닿아


맥주를 마시고 자려다 잔을 깨뜨렸다. 바닥에 앉으면 가슴 높이도 안 오는 상에서 툭 떨어진 것이 와장창, 하고 깨졌다. 가끔씩 무언가 깨지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좀 우습다. 늘 갑자기, 별 것 아니게 깨어진다. 툭 떨어졌다 싶은 것이 와장창. 핸드폰 액정이든, 유리잔이든 다 그렇다. 또 그렇게 깨진 유리는 꼭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눈곱만큼 작은 파편으로, 저 구석까지 가서 퍼진다. 다 닦아냈다 생각해도 그렇게 꼭 발바닥을 찌른다. 떨어질 때 좁은 면적으로 떨어지면 그렇다던데, 넘어지지 않겠다고 팔을 쓰다가 꼭 다치니까 무조건 엉덩방아를 찧으라는 어느 안전요원의 말이 스쳐갔다.


며칠 전 선물 받은 튤립을 하나뿐인 화병에 꽃아 베란다에 내어놓았다. 여느 꽃다발이 그렇듯 꽃잎과 이파리가 아래로 은근히 내려앉는 것이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역사에 팔길래 사봤다던 누구의 목소리가 떠올라 계속 물을 갈아주게 된다. 늘 그렇다. 꽃이나 풀, 나무보다 꽃이름을 줄줄 외는 할머니, 일하는 카페의 이끼에 수시로 물을 뿌려주는 일, 불현듯 한 움큼 몰려오는 라벤더 향에 멈추던 길이 더 앞장선다. 눈앞에 있는 이름을 궁금해할 틈 없이 장면이 먼저 몰려온다.


꽃은 어쩜 또 꽂는다는 말까지 쓰는지. 이름이 행위를 데리고 온다. 꽃을 받으면 꼭 어디에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건 그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난스레 머리에 꽂고 놀든, 시드는 것을 아쉬워하며 겨우 물만 갈아주든, 약간의 애정이 늘 기반이 되어 꽃을 만난다. 시들고 깨지는 일이 좀처럼 기분 좋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약간이라도 있던 애정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고부터는 술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았다기 보다는 모였다, 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집에서 술을 즐기는 것을, 그것도 꼭 잔에 따라마시는 걸 아는 지인들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면 술잔을 나에게 건네왔다. '이미 많을 것 같지만, 네가 생각나서.' 그 표정들을 찬장에 나란히 세워두고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잔이 깨지는 일이 꽃이 시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곁에 모인 마음들, 하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되었을 것들. 꽃이 시들고 잔이 깨져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 그저 잔해를 치우고 하던 일을 계속 해야하는 나날. 그런 것들이 닮았다.


너무도 쉽게 관계를 놓아버린 이들에 관해 생각한다. 부딪히는 게 무서워서, 깨지는 게 무서워서 멀쩡한 꽃을 버려두고, 잔을 내려두고 저 멀리 떠나간 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시들어버린 꽃과 먼지쌓인 잔. 정작 해야할 말은 피한 채 둘러대는 관계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원망보다도 그냥 거기까지였나보다, 하고 마무리 짓는 스스로가 더 오래 남아서 괴롭다. 나마저 내 기대를 떨어뜨리는 기분. 산타는 안 올 거야, 생각하고 잠을 청하지만 결국 설치고 마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


향이 진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지나온 시간은 계속 멀어지고 더해지는데, 늘 생각할 틈 없이 장면이 몰려온다. 끝까지 강렬한 기억을 준 사람은 오래 남는다. 감정은 사라져도 불쑥불쑥 기억이 튄다. 조금이라도 닮은 이가 있으면 눈이 가고, 그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절에는 혼자 걸어도 함께 걷는 기분이 든다. 차라리 모두가 그 사람 향을 알면 좋을텐데. 그래서 다 비슷하게 슬퍼하고, 다 비슷하게 사랑하면 좋을텐데. 혼자서 끌어 안는 것이 버겁다가도 흐려지는 것이 싫어서 손을 꽉 쥐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래도 결국에 향은 바래고, 그 미세한 잔향 위에 새로운 향이 겹친다. 그걸 레이어드, 라고 하던데. 멋드러진 조향사가 되어 너를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내내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돌아보면 한참이 지나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같이 걷고 있었던 셈이 된다. 가끔은 그게 어떤 애도보다도 위안으로 번진다.


https://youtu.be/ZCM6EZVF3LU


생각나나요 아주 오래 전 그대

내게 줬던 꽃병

흐드러지게 핀 검붉은 장미를

가득 꽃은 꽃병


우리 마음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바로 너겠구나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그대 닮은 꽃병


시절은 흘러가고 꽃은 시들어지고

나와 그대가 함께였다는 게

아스라이 흐려져도

어느 모퉁이라도 어느 꽃을 보아도

나의 마음은 깊게 아려오네요

그대가 준 꽃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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