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 - 도망가자
도망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도망은 끝까지 해본 사람들이나 이젠 모르겠다, 하고 치는 거 아닌가. 그럴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라는 말이 가슴을 옥죌 만큼 실감이 났다. 끝이 어딘진 몰라도 이게 끝이면 이렇게 찝찝할 리 없는데. 적어도 뭐라도 결과가 나와야하지 않나. 지금 이 상황이 그간 해온 것들에 대한 결과라면 꽤나 허무하지 않은가. 내가 잘못한 건가. 마음은 이미 주저앉아 나를 미워하는데도, 조금 지쳤다고 도망가는 건 해온 것들을 다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쌓아온 것들이 그대로 있을까 ? 답은 늘 그럴 리가, 였다.
어제 처음 본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창이 난 쪽을 바라본다. 볕을 따라 부유하는 먼지가 눈에 보이고, 골목 어귀를 두 번은 돌아야 만날 것 같은 곳의 소리가 여기까지 건너온다. 고요해지고 나서야 보이고 들리는 것들. 나는 도망을 왔고,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다. 먼지를 따라 묵혀 두었던 생각이 흘러나온다. 지쳤구나. 그럴만 했구나. 열심히 했다. 충분했네. 나한텐 이런 게 필요했었네. 얼굴에 내려앉는 빛이 따갑지 않은 게 얼마만이더라. 봄을 찾아 내려왔다.
사람도 일도 나를 잘 기다려주지 않았다. 꼭 자리에 없을 때만 나를 찾는구나, 싶었다. 기회는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온다면서. 꼭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없을 때에만. 내 주변의 모든 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정말 열심히 하는 게 맞아? 여기로 가는 게, 지금 이게, 정말로 맞아? 원치 않는 휴일이 오면 사람이 떠나간 빈자리에 내 몸을 구겨넣고 자주 울었다.
잠깐 머리라도 식히고 오는 게 어때? 눈을 뜨고 천천히 주방으로 가는데 불현듯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왜 날 혼자 보내?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같이 가주면 되잖아. 그게 안되니까 그렇지. 미안해. 요즘 바쁜 거 알잖아. 그래, 넌 늘 그게 먼저지. 왜 말을 또 그렇게 해. 꼬리를 잡는 말들에 매번 진심은 파도를 만난 모래성마냥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꼬박 석 달이 된 금요일 아침이었다. 손에 잡히는 가방에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넣었다. 칫솔이랑 렌즈통도 챙겨나올 걸 그랬나. 가서 사지 뭐. 잔고를 한 번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해남에 왔다. 서울에서 8시간. 터미널에서 다른 터미널로, 또 시외버스로. 몇 번이고 그만둘까 싶었지만, 한 번 쯤 해남이라는 곳을 밟고 싶었다. 이 땅의 끝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끝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좀처럼 땅끝마을로 가볼 일 없다는 사실도 늘 조금 아쉬웠다.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곳으로 여덟 시간을 꼬박 향하는 일이라니. 이게 도망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얼핏 웃음이 났다. 가는 동안 숙소를 예약하고,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고, 엉덩이가 저리다 못해 아플 즘이 되어서야 해남에 도착했다. 그렇게 용케 이곳으로 왔다.
창이 큰 곳을 예약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마을. 그 소리에 깬 것 같이 눈이 떠졌다. '숙소는 편안하셨나요 ? 체크아웃은 12시입니다. 맞은 편 기사식당이 꽤 괜찮아요. 식사를 하고 가실 거라면 추천드립니다 : ). 즐거운 여행 되셔요 . '숙박어플의 알림을 가만히 보다가 답을 했다.
'혹시 연박이 가능할까요?'
이제야 도망을 왔다.
https://youtu.be/tmiukqj1UtM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게
어디를 간다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