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재 - 우연을 믿어요
그날 내가 한 정거장 먼저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 카페에, 그 술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으로 시작하는 말은 늘 방대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언제는 그런 가정들이 퍽 로맨틱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종류의 물음에 매번 답하기를 꺼려했던 과거의 이도 이해가 간다. 이미 일어난 일을 굳이 되짚어다가 가정을 덧붙여서 뭐해. 당장 눈 앞에 있는 일이나 관계에 쏟을 에너지도 얼마 없는데. 같은 종류의 마음이었으리라. 이럴 때면 꼭 이해의 범주가 낭만의 범주를 잡아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래도록 철없이 살고 싶다는 언니의 말은 이런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을까. 그러면서 나는 또 한 번 누구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나비효과라는 말을 붙들고서, 눈앞에 있는 관계나 일을 세세히 살피다 보면 불현듯 신비로운 기분이 든다. 옴니버스식 구성의 이야기들이 꾸준히 인기 있는 이유도 같은 결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게 이렇게 이어지네, 하게 되는 순간이 꽤 재미있는 것이다.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연이라는 게 참 사람을 아이처럼 만든다. 내가 하필 그 사람과 옷깃이 스쳐서 지금 이 순간에 그 사람 손을 부여잡고 있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것이다. 사소한 선택들이 모여 만든 지금을 신기해하며 곁에 있는 사람과 같이 호들갑을 떨 때면 뭔가 삶이 좀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운명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이해하기에 앞서 인정부터 해야 하는 그런 어려운 수식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어찌어찌 그렇게 운명론을 믿고 싶다는 마음에 도착한다. 애초에 진실과 믿음은 한데 있지 않다. 그냥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 진실이 설 자리는 딱히 있지가 않다.
어떤 흉터는 앞으로 나아갈 디딤이 되지만, 또 어떤 흉은 방어기제가 되기도 한다. 조금만 근처에 가도 덜컥 겁부터 나고, 보이지 않게 덮어두지만 혹여 덧날까 싶어 괜히 몇 번 들춰보는 것. 결국 그게 덧을 내는 것. 이쯤 되면 왜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나는 왜 그 인간일까, 싶기도 하지만. 사소한 위안으로 필요한 외면을 해가며 아물겠거니, 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겠거니,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다. 어찌 됐든 답은 내가 적어내는 것이니까. 때로는 정답보다 최선이 더 중요하다. 흔한 말이지만, 그 흔한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https://youtu.be/OCgy94foNvs
이유는 없어요
그냥 이렇게 됐을 뿐
어쩌다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죠
영문도 모른 채 우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로
사실 조금은 떨리기도 하죠
모든 게 서툰 나인데
너무 어려운 걸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내 맘 같진 않았죠
답을 말해주는 이
하나 없이도 우린 잘해왔죠
이제 더는 남들 얘기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아요
우연을 믿어요
당신과 나처럼
언제나처럼 해왔던 대로
우연을 믿어요
정답은 없어요
그냥 스치듯 흘려 보내고
언젠가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 그게 답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