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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Mar 15. 2022

봄이 가장 느리게 오는 마을

춘천에 왔다. 혼자 하는 여행이 얼마 만이지. 넉넉잖은 벌이를 생각하면 여행을 다녀오는 건 아무래도 큰 지출이고, 그래서 이왕 여행에 갈 거라면 애인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작년부터 두 번의 제주와 한 번의 통영, 진주를 다녀왔다. 촬영 겸 다녀온 곳도 있고, 오롯이 둘이고 싶어서 다녀온 곳도 있었다. 별다른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숙소와 떠나온 만큼 늘어난 대화, 낯선 길을 도란도란 함께 걷는 것만으로 여행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혼자 여행하는 기분이 이랬었지.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해야 하고, 하지 않아도 그것대로 흘러가면 그만인 이 멋들어진 여행의 재미가 생경하면서도 꼭 맞는 옷처럼 되살아났다.

 

처음 혼자 떠났던 여행지는 제주였다. 스물 하나, 여름이었으니 7년이 조금 덜 지났다. 나이 차이가 꽤 났던 당시의 애인은 잠을 줄여가며 나를 만났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던 일이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부분의 데이트는 하루에 한 끼니를 함께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그 시간마저 일을 할 수 있으면 흔쾌히 식사를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로 때울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진심으로 임한 첫 연애였고, 그래서 별 거 아닌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이렇게까지 휘둘릴 수 있다는 것도 그 관계에서 처음 알았다. 그런 와중에 그가 점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물한 살이 바쁜 것과 서른 후반이 가까워져 가는 사람이 바쁜 것은 차원이 달랐다. 서운하냐는 물음이 잦아졌고 말로는 아니라 하지만 표정에는 아닌 게 아닌 것이 다 드러나는 시기가 길어지자, 그는 경비를 대 줄 테니 이번 기회에 혼자 여행을 다녀오면 어떻겠냐 제안했다. 언젠가는 혼자 여행을 갈 것이라던 말을 떠올린 듯했다. 데이트할 시간이 정말로 없다는 말 같아 조금 서운하면서도, '언젠가'가 당장 며칠 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신도 나는 것이다. 그렇게 다소 고장난 표정으로 비행기 티켓을 받았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떠난 스물한 살 여름의 제주는, 비가 막 그친 뒤 비자림의 숲 내음은, 날이 맑을수록 색이 선명히 나뉘던 세화 바다는, 버스 정류장 이름에 해변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버스 배차와 서울에서 그랬다면 하루에 클레임 열 번은 받았겠지 싶은 속도의 제주 버스는, 그래서 내려야 하는 곳 세 정거장 전부터 긴장하던 몸은 그 후 근 2년을 꼬박 틈만 나면 제주로 떠나게끔 만들었다. 시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통영이나 강릉, 해남 같은 곳도 궁금해졌지만, 날과 시간만 잘 맞추면 한없이 싸게 살 수 있는 비행기표와 한 시간도 안되어 섬에 떨어지는 편리함이 늘 제주행 티켓을 끊게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과의 어색한 술자리가 주는 재미도, 숙박객이 없어 혼자 묵게 된 방에 괜히 신이 나는 것도, 생각 없이 바다를 따라 줄곧 걷는 일도,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 시간도 다 소중했다. 그렇게 드문드문 사계절의 제주를 다 보았고, 스물둘 여름엔 세화를 좋아하게 만들었던 카페와 책 작업을 하게 되면서 두 달가량을 제주 동쪽에 살았다. 봄과 가을의 제주가 면허 없이 혼자 하는 여행에 가장 좋다는 것을 이때 다시금 깨달았다. 여름방학을 틈타 내려갔던 것이라 두 달 살이 동안은 극성수기의 제주를 보았는데, 너무너무 더웠다. 바닷바람과 뜨거운 볕이 만나 염분기 있는 더운 바람이 되었다. 그것이 땀과 섞여 온몸에 찝찝하게 머무르는 것은 통 유쾌하질 않아서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은 날도 더러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살아보는 경험이기도 했다. 가까운 모든 이들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외로웠지만, 그것 빼고는 다 좋았다. 혼자 장을 보는 것도, 식재료 하나하나가 생경한 것도, 늦은 저녁 통화하며 편의점에 다녀오는 것도, 혼자 해도 억울하지 않은 만큼만 빨래와 청소 거리가 나오는 것도 다 마음에 들었다. 혼자 사는 것에 꽤나 소질이 있다는 생각도 이때 했다.


여러모로 제주가 짙게 뱄던 첫 연애가 지나가고, 서울에서 어엿한 1인 가구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혼자 사는 삶이 익숙해지면서 혼자 가는 여행의 빈도도 자연히 줄었다. 혼자이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기엔 충분히 혼자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고, 기력이 넘칠 땐 집에서 부지런을 떨고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력할 땐 움직임 자체가 귀찮았다. 여행을 갈까 싶다가도 표를 끊고 숙소를 잡는 것부터 숙제처럼 느껴지는 통에 줄곧 침대를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문득 춘천에 온 것이다.

 

며칠 전 열린 첫서재 4월 숙박 안내. 내일까지네요!


숙박비를 5년 후 돈이 아닌 것으로 받겠다는 당돌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문구에 홀렸다. 과 후배이자 브런치 선배인 요아의 sns에 첫 서재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는 글이 올라왔고, 궁금한 마음에 계정을 구경하다가 슬슬 혼자 여행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피었다. 한 달 전부터 미리 신청서를 적어뒀다가 3월 숙박안내글이 올라오자마자 신청서를 보냈다. 며칠 후 '안녕하세요, 닿아님. 첫서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을 받았을 땐 괜히 뭔가 해냈다는 기분에 일을 하다 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봄이 가장 늦게 오는 지역이 어디인 줄 아세요?'

질문의 의도에서 답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춘천인가요?'

'맞아요. 춘천은 분지라 봄은 가장 늦게 오는데 여름은 또 제일 빨리 와요. 우리나라에서 봄이 가장 짧은 셈이에요.'

봄이 가장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이름에 봄을 지녔다고, 그게 꼭 삶 같다는 서재지기님의 말과 표정을 기억한다.


마지막 날 점심으로 먹었던 막국수 집에서도 비슷한 마음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막국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주인 할머니가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셨다. 내가 볕 가까운 자리에 앉은 것을 보시고는 창가에 죽 늘어놓은 당신의 식물들 중 빨간 꽃이 핀 화분을 콕 집어 말씀하셨다.

'햇볕이 참 중요해. 요 며칠 날이 개고 해가 길어지더니 빨갛게 꽃이 올라왔어.'

'너무 예뻐요. 얘는 이름이 뭐예요?'

'(사이) 몰라 ~. 시장에서 싸게 팔길래 얘랑 쟤랑 사 왔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요 초록잎 밖에는 없었다니까. 그래서 중요해. 해를 보고 땅을 밟아야 해.'


춘천행이 결정되고 머지않아 일하는 곳에서 큰일이 터져 마음이 어지럽던 터였다. 혼자 어디든 다녀오는 일이 필요하다 느껴 결심한 여행이기는 했지만, 필요 이상의 일들이 터지니 필요를 넘어 점점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훈련소에 들어갔던 애인의 부재도 그 간절함에 기여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기차에 올랐다.


출발부터 여행을 실감한 것이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제시간에 출발과 도착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행을 시작한다. 예를 들면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놓치면  된다는 생각과 제때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여행지에 도착 숙소에 짐을 풀기 전까지는 약간의 스트레스를 지닌 채로 이동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일행이 있을 때의 내가 유독 그렇게 된다는  새삼 깨달았다.  말고 그에게도 좋은 여행이어야 하니까, 하는 일종의 책임감과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이  한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니  그러려니 싶어졌다. 비교적 일찍부터 신이 나기 시작했다는  또한 느꼈다. 그래서인지 (영상을 찍어둔 덕도 있겠지만) 여태껏 선명한 장면이 많다. 남춘천역까지 가는 동안 기차 안이 줄곧 고요하던 , 아끼는  위로 볕이 쏟아져 들던 , 오래도록  사진과 영상을 챙겨봐 주시던 분을 가고 싶던 펍에서 만난 , 밤늦도록 시간 가는  모르고 서재지기님과 온갖 말을 나눈 , 오롯이 혼자 계속 걸었던 , 노을 지는 소양강을 자주 멈춰서  ,  쪄낸 감자떡을 받은 , 오전의 차고 고요한 공기를 온몸으로 맞은 , 결심하고  것도 아닌데 틈틈이 영상을 찍게 되던 , 결국 그렇게  편을 만들게  .


실로 오랜만에 쉬기 위해 여행을 택했고, 원하던 만큼, 사실 그 이상으로 쉬고 왔다. 좋은 도망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물이 돕는 것 같았다. 봄을 찾아온 것 마냥 춘천에 머무르는 동안 내리 따뜻했다. 긴팔 티 한 장만 입고 돌아다닌 적도 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비가 오고 추웠다며, 내가 봄을 몰고 온 것이라 답해주신 서재지기님 덕에, 막국수를 주문하자마자 면 뽑는 소리가 들리던 덕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밤공기 사이로 봄을 온몸에 묻히며 걷던 취기 어린 밤 덕에 춘천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입춘대길'이라는 말을 자주 마음속에서 읊었다. 이런 봄이라면 조금 짧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뭐, 원래 봄은 아쉬워서 더 예쁜 계절이니까.



https://youtu.be/DIGzBksgG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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