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세 번이 오는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나에게도 기회라는 것이 온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내 염원이 현실이 되었을 때였다. 내가 남기 원했던 가까운 타국의 대학교에서 유학생만을 위한 대학원 전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알게 된 한국인 유학생 선배의 도움도 받아 학부 때의 전공을 이어 화공학 석사 과정에 합격했다. 사실, 유학생 전형이라는 것이 실력자를 뽑는다는 것보다는 당시 일본이 유학생을 늘리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유학생이라는 정의에 속하기만 한다면 쉽게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까지 일본어도 유창하지 않던 나에게는 정부 정책에 맞추어 난이도가 낮아진 시험의 덕을 많이 본 것이다. 하지만 이국 땅에서의 기회라는 것은 그것의 난이도를 떠나 실제로는 다 어려운 것이다.
대학원에서의 2년 간의 유학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매일 특급열차라도 탄 듯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석사 졸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유학초에는 몰랐던 대기업에 ‘추천인 제도’라는 이름의 ‘자, 평탄한 레일 위로!’라는 선택권. 이 추천인 제도는 기업에서 대학교에 제공하는 것으로 이 제도를 이용해서 이력서를 내면 다른 구직자보다 더 가점을 받게 되는 이점이 있었다. 즉, 취업을 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유학생의 채용이 활발하지 않던 때에, 추천인 제도를 ‘마다할 이유가 1도 없지’라고 생각해서 바로 내가 희망하는 회사의 신청서를 받았다. 동기들의 도움도 받아가며 그 회사에 취업 지원서를 냈고 합격하게 되었다. 문장으로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일본인 대학원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30군데 이상 지원한 다른 회사에서는 쓴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래서 추천인 제도가 없었다면 그대로 귀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그 제도 덕분에 한국 지방에서 온 유학생의 손을 잡아 주는 곳이 있어서 일본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취업한 회사는 화학공학과 관련된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곳으로 내가 맡은 일은 필름을 만드는 일이었다. 필름이라고 하면 보통 카메라를 연상할 수 있으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넓은 막을 부르는 명칭이라는 것을 배치된 첫날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기술부서의 일원이 되어 신제품의 테스트하고 시제품을 만드는 일을 선배 몇 명과 함께 담당했다. 직장을 들어가 첫 월급을 타던 날, 외국인으로 취직까지 혼자서 해 냈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감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 자신이 조금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수개월이 지나자 대부분의 회사 사람들이 내가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고 싶어 하는 동경대나 교토대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들으며, 나는 내가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회사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돌이라면 자신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해 덕후 성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덕후의 흥분은 없었다. 밤을 새워서 까다로운 조건을 알아내 양질의 상품이 나왔을 때조차 주위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이공계 성향이 아니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 그리고 회사 생활 2년 총 8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뒤에야 온 깨달음. 천성적인 슬로 러너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커리어 변경의 결정은 쉬웠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더 생각하고 알아보고 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회사를 퇴사. 물론 퇴사 이유라는 것이 능력 부족만은 아니었다. 청결한 대다수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이유인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도 퇴사를 부추긴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문과계열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직장은 대학교 사무직. 뜬금없는 업종의 전환이었다. 내가 대학교에 가기로 한 이유는 전 직장에서 외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싸워야 하는 일상. 내가 모르는 말이 표준어인지 업계 용어인지, 사투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 것부터, 자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는 불편함이 힘이 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다가 알아낸 것이 대학교의 유학생 담당이었다. 그리고 내 바람은 그대로 현실로 반영이 되었다.
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난 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라는 수십 년이 지나도 항상 새로운 풋풋함으로 채워지는 공간.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직원들이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물론 주변 환경보다 DNA에 더 지배를 받는 일부도 있었지만 말이다. 직장 환경으로는 언제나 계절이 봄인 곳. 게다가 급료도 다른 업계의 같은 연령대에 비교해 더 높았다. 그리고 이윤을 쫓는 다른 업계와의 가장 큰 차이며 근로자에게는 장점이자 동시에 동기부여의 퇴색을 가져오는 ‘실적과 관계없는 나이가 결정하는 급료’는 매력적이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완벽한 환경에 내가 있어본 적은 없었다. 또한, 대학교에 취업한 지 2년 차에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생애 첫 경험들이 안팎에서 쏟아졌다. 경제적 여유와 현지인과의 국제결혼까지, 모든 일이 다 내 예상을 넘어서서 나타난 행복이었다.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