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봄, 지방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적성보다는 ‘입시 성적에 맞춘 진로’에 따라 가까운 지방대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진로를 입시 성적으로 정했으리라 생각한다. 참으로 망망대해에 특별한 근거 없이 목적지로 모두를 내 모는 듯한 진로 결정에 왜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IMF사태로 세상이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애가 무엇을 알겠는가? 연일 국가의 위기, 파산이라는 단어가 TV에서 흘러나왔고, 급기야는 집에 있는 금을 모아야 한다고까지 일이 커졌지만, 나는 대학교라는 새로운 커뮤니티에 적응하는 것이 국가 파산보다 더 큰 일이었다. 한 곳에서 남자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동기와 외계인과 같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무언가 무서워 보이는 선배들을 보면서 때로는 이런 게 대학 인가하며 마음이 붕 뜨기도 하고 때로는 몸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는 나날을 보냈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고등학교와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매일 보는 사람들이 교복을 입지 않고, 수업은 안 나가도 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숫자 20이 갖는 힘인 술이라는 제한 아이템의 해제 등은 통제라는 고등학교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이었다. 어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IMF사태는 강 건너 불구경에서 강 건너온 불씨가 되었고, 결국 우리 집의 경제상황도 크게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보편적으로 적게, 혹은 많게 모든 국민들이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정도는 평범하게 힘든 일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신분 변화가 생겼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는 집단에 합류한 나는 시간 벌이의 목적으로 군대를 선택했다. 제대 후에도 내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1년을 더 휴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아르바이트의 나날. 이때는 누가 내 직업을 물어보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대학생이지만, 대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이런 적이 있었다. 얼굴만 보면 아무도 내가 학비를 냈는지, 아니면 대학생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학비를 내지 못했던 나는 스스로가 대학교에 소속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렸고, 학교 정문을 들어가고 나오는 여러 사람들과는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기는 학교 측에서 보자면 학비를 안 낸 불청객이라고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참으로 자존감이 낮은 아이여서 그랬던지, 아니면 단순히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지 아니면 둘 다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쁜 일이란 게 다 나쁘다고 할 수 없듯이, 1년 늦게 돌아간 대학에서는 아르바이트보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몸이 뒤틀리던 공부가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이 아니라, 고생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해 보면 알 수 있는 보편적인 깨달음 때문이었다. 덕분에 복학한 다음 학기부터는 학비의 일부를 학기말 성적으로 보충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복학 후 2년 남짓 지났을 때, 대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일본 교토에 있는 대학과 내가 다니던 대학이 교환 학생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맺은 교환 학생 제도라지만 학교에서는 바로 실적이 필요했는지 일본에 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때는 내 인생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해외 유학, 아니 그전에 ‘비행기’ 근처에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내게는 큰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미 휴학으로 늦어진 일 년, 더 늦어져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아서 4학년 2학기임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기분으로 일본으로의 교환 유학을 신청했고, 경쟁자가 없었던지 쉽게 일본행이 결정되었다.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나라, 일본. 나는 국사 시간과 뉴스 등에서 일반적으로 듣던 내용으로 그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을 했던 역사적, 정치적인 내용들로 골머리를 앓는 것은 아닌 지하는 걱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런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한편으로는 원래부터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서 편안함까지 느낀 것을 기억한다. 1년간의 교환유학은 단연코 윤택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이 눈만 뜨면 널러 있어 즐기면서 생활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인생의 상승 그래프의 시작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작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친절함에서, 크게는 내 신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스키장에 간 것 등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곳에 있으면 나라는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조금 더 다른 삶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하고. 그래서 그곳에서의 삶이 조금 더 이어지길 조심스럽게 염원했다.